책 속으로 난 길

나무

귤밭1 2004. 10. 22. 00:25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황지우, <서풍(西風) 앞에서> 전문
나무는 나에게 가장 친근한 자연입니다. 그냥 자연 자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나는 산을 좋아하는데 산을 대표하는 것도 역시 나무입니다. 나무가 없는 산은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가 우리에게 매력적인 대상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자연에서 멀어진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는 인공의 숲일 뿐입니다. 사실 도시를 말할 때 '숲'이라는 비유는 그렇게 적절하지가 못합니다. 사람이 만든 것에다 저 나무의 신비와 자연스러움을 빌려 와 비유로 쓰는 것은 나무에게는 몹시 슬픈 일일 테니까요!

나무는 또 지상적인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표상하기도 합니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라는 동요 구절도 있습니다만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나무들은 땅의 구속을 벗어나 영원과 절대로 초월하려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나무의 꼭대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하늘을 나는 새가 떠오릅니다. 그럴 수밖에요. 나무에 집을 짓는 것은 새니까요. 그러므로 하늘을 향해 치켜 든 나뭇가지야말로 새의 비상인 셈입니다. 물론 새나 나무나 하나같이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극과 닮아 있습니다. 현실을 뛰어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고 결국에는 실패하고 마는 것이 비극의 요체입니다. 그렇다면 나무는 인간적 위엄의 정수, 즉 결국에는 패배하고 말 것을 알면서도 패배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형상이라고 할 만합니다.

또 나에게 나무는 말없이 견디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특히 겨울 산에 오르면 무언가 엄숙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데 나무가 주는 위엄 때문일 것입니다. 잎을 다 떨군 겨울 나무들은 헐벗은 성자 같습니다. 박해받기로 결심하여 세상의 고통을 드러내는 성자 말입니다. 나무는 욕심이란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버리고 나무의 정수라고 할 것만 남겨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 몹쓸 추위에도 안으로 생명을 간직했다가 봄이 되어 연두색의 변주곡을 터뜨리는 것을 보노라면 과연 인고의 태도가 뿜어내는 찬란한 아름다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날이 자연이 황폐해지고 하는 가운데서도 고향을 묵묵히 견디며 지키는 것도 역시 나무입니다. 우리 고향 마을도 갈 때마다 달라진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게 됩니다. 지난번에 갔을 때도 우리 집 바로 윗집이 헐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향이라고 말해 주는 것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드신 부모님이나 어릴 적 친구들도 머지 않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들은 그들이 없어진 뒤에도 늘 그 자리에 있어 고향을 증거해 줄 것입니다. 어릴 때는 거대하게 보였던, 그 밑에서 놀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잠을 자기도 했던 팽나무가 이제는 많이 작아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의연하게 서 있으니 말입니다. 헐린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벚나무(처음 글을 쓸 때는 무의식적으로 '벗나무'라고 했다가 고쳤습니다. 나에게 그 벚나무는 벗처럼 여겨졌던 모양입니다.)가 그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어릴 때 거기 올라 버찌를 따먹기도 했었던 추억이 서린 나무였으니까요. 그 집에 살던 내 어릴 적 친구는 이제 고향에 살지 않지만 나무가 있어 그를 기억하게 만들어 줍니다.

잘 아다시피 종이는 나무로 만듭니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종이를 우리는 나무보다 더 가치있게 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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