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화장터 이야기(2001. 10)

귤밭1 2004. 10. 23. 06:28

 

서울 방면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오다가 서울에 다 이르르면 플래카드가 길가에 쭉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서울시에서 화장장을 세우기로 한 청계산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유심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화장장을 세운다는 데 대해서 그쪽 주민들의 반대가 아주 심합니다. 그래서 서울시에서는 서울 시장 공관을 그 근처에 짓고 화장장을 추모공원으로 꾸민다고 하는 것을 내세우기도 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화장장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한사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집값이 내려간다는 게 그 이유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천박한 이기주의에 대해서는 여기서 본격적으로 문제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플래카드 가운데 어느 하나에 쓰인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문구대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하는 길에 화장터가 웬 말이냐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해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태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징후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래카드의 내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은 피해야 할 더럽고 불편한 어떤 것입니다. 이렇게 이 시대는 죽음을 억압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어디 이 플래카드뿐인가요? 도처에 죽음은 아주 흔하게 널려 있는 걸요. 멀리 갈 것 없이 아이들은 입시 때문에 고민하다가, 아프카니스탄에서는 맑은 눈망울을 한 어린이가 그곳에 태어난 것이 죄가 되어 죽어갑니다. 정말 이런 죽음은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이 인위적으로 인간을 죽도록 만드니까 말입니다.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이런 현상이 죽음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꾸 그 죽음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고 발버둥칩니다. 삶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타자로 삼아 피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야말로 이렇게 죽음을 망각하려는 현대인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화장터가 자기가 사는 곳 가까이 있어서는(실상은 그렇게 가깝지도 않습니다만) 안 되는 거지요.

죽음은 삶의 한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자체는 그렇게 무섭거나 더러운 것일 수가 없습니다. 자연스런 순환 과정에서 거쳐야 할 한 단계일 뿐이지요. 옛날 어른들이, 죽어서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고 자기가 묻힐 곳을 정하고 찾아가 눈에 익히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어떤 한계를 설정해 줍니다. 사실 우리 삶이 뜻을 가진다면 바로 이 죽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부여하는 생물학적인 필연성, 다시 말하면 한 번 태어나면 죽어야 한다는 유한성과 일회성이야말로 우리 삶을 진지하고 엄숙한 것으로 만듭니다. 사실 인간의 위대한 문화적 업적들은 모두 이 유한성을 초월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소산입니다.

문학도 마찬가집니다. 서양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갈래로 치는 비극이야말로 이 유한성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초월하려는 모순의 산물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비극에서 인간이 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비극적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죽음을 걸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종적인 한계인 죽음을 생각하니 자기 인생을 막 굴릴 수는 없었던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김종길은 이육사의 <절정>(1939)에 대해 '비극적 황홀'이라는 말을 써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한번 이 시를 읽어 볼까요?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김종길의 말도 함께 들어 봅시다.

그러고 보면 이 절정은 그가 비극적인 인물로서의 자기 자신에 부닥치는 일종의 한계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항복과 타협을 모른 채 다만 자기가 비극의 한가운데 놓여 있음을 깨닫고 겨울, 즉 '매운 계절'을 '강철로 된 무지개'로 보는 것이다.

이 비극적인 비전은 또 하나의 비극적 황홀의 순간을 나타내며 여기서 다시 우리는 시인이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의 객관적인 이미지를 발견함을 본다.(김종길, <한국시에 있어서의 비극적 황홀>, <<심상>>, 1973년 2월호, 16쪽)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뒤에 오는 황홀한 느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비극적 상황의 극점에 이르러 오히려 달관하는 고결한 정신'(김종철)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비극적 황홀'이라는 개념은 정말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죽이는 삶,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천박한 삶이 우리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학대받을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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