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토지>>의 길상과 병수-슬픔과 외로움에 대해

귤밭1 2004. 10. 25. 01:36

 

박경리의 <<토지>>는 매력적인 인물을 낳는 기름진 땅입니다. 그 가운데서 길상과 조병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병수는 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나를 알아주던 단 한 사람이었네."(박경리, <<토지>> 13, 5부 1권, 솔, 1993, 206쪽) 동병상련의 처지였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은 먼저 최서희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은 처지입니다. 병수는 꼽추로 서희를 마음속으로는 몹시 좋아하지만 아버지 조준구와 어머니 홍씨가 병수와 서희를 혼인시키고 재산을 가로채려는 계획을 알자 그렇게 되면 죽어 버리겠다고 합니다. 길상도 그 여자와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미천한 신분에서 말미암은 복잡한 심리 사이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갈등을 겪은 바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부를 가장 좋아하는데 다른 데(<깊디깊은 사랑-<<토지>>의 용이와 월선이>)서 얘기한 적이 있는, 용이와 월선이의 도저한 사랑도 그렇거니와 서희와 길상 사이의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랑을 둘러싼 내면적인 투쟁이라고나 해야 할 양상이 감동적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인간이라는 게 참으로 복잡한 존재구나 하는 점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럴 때 소설가는 신의 자리에 가까이 가 있는 경이로운 존재가 됩니다.

옆길로 새고 말았네요. 또 둘은 예술가라는 점에서 꼭 닮았습니다. 길상은 관음탱화를 완성합니다. 병수는 소목으로서 목공예의 장인입니다. 이들이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얘기한 신분이나 불구의 몸에서 오는 괴로움과 절망을 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구자로서의 번민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수모, 천지간에 맘도 몸도 기댈 수 없었던 처절한 고독, 그것은 병수 자신을 위한 목마름이었지만 그 목마름 같은 것을 누르고도 남을 크나큰 고통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부모의 큰 죄는 바로 자신의 죄요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은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당기지 아니했던가.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 날뛰었다. 그를 구원한 것이 바로 이 소목일이었다. 이제 병수는 용서를 받은 것이다. 자학은 일(예술)에서 승화되었다. 일은 그에게 있어서 만남이었다.(<<토지>> 9, 3부 3권, 삼성출판사, 1979, 296-7쪽)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조건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작가도 고통을 창조적인 일로 탈바꿈시켰다는 점에서 이들과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보노라면 위대한 예술은 고통이 없이는 나올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프로이트 말마따나 예술은 욕망의 직접적인 충족을 유예한 대가로 주어지는 고통의 산물입니다.

또 이미 앞에서 말해 버렸습니다만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선천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같습니다. 길상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최참판댁의 종으로 지냈고, 병수는 꼽추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한을 삭이며 살아온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맑은 심성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조병수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어린이같이 천진무구하며, 할아버지인 길상도 소년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럴 수 있는 것은 슬픔과 외로움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는 점을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인간은 절대로 막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준구가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병수는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묵묵히 감수합니다. 구제받지 못하여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자, 육체를 안고 버둥거리는 생명에 대한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길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우고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길상의 큰아들 환국이 길상이 그린 관음상을 보고 지감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볼까요.

"아버지는 참 외로운 분 같습니다."
환국이 말문을 열었다.
"관음상을 본 감상인가?"
"네."
"자네 말이 맞네. 원력(願力)을 걸지 않고는 그같이 그릴 수는 없지.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이라면 슬픔과 외로움 아니겠나?"(<<토지>> 13, 솔, 311쪽)
슬픔의 눈물은 우리 영혼을 맑게 씻어 줍니다. 외로움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도록 하지요.

이들을 만나면 우리도 저절로 깨끗해진 영혼을 갖게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좋은 작품은 영원한 축복입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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