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외롭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이파리를 다 떨어뜨리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긴 나무들이나 실연당한 사람을 볼 때에 그런 감정에 젖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져도 그럴 것 같다. 얼른 보기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이어서 고독과는 정반대되는 상태일 것 같지만
유행가가 늘 노래하는 바와 같이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그런 법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상은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랑의 유토피아는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늘 '저만큼' 있는 것이다. 사랑이 동반하기 마련인 고통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혼자임'에서 나온다. 혼자 살고 죽어야 한다는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조건은 어느 누구도 물리칠 수 없는 것이다. 몹시 아프거나 죽음을 눈앞에
둘 때가 특히 이런 조건을 절감하게 하는 시간일 텐데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절대자를 찾는 것도 그러므로 이해가 간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고독이란 말이 좀 고색창연하게 들리겠다는 기분도 든다.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통신 기구와 교통 수단의 눈부신 발달로 고독을 제대로 느끼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 전과 견주어 사람들이 훨씬 고독해졌지만 잘 견디지 못한다고 해야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고독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만큼 개인의 정체성도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글 쓰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도 이런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느리게 혼자서 자신과 주위를 골똘하게 살펴야 글이 나온다. 그러므로 고독하지 않고서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내면은 고독해야 넓고 깊어진다.
물론 늘 무거울 수는 없다. 또 여럿이 모여 즐겁게 노는 광장도 꼭 필요하다. 사실 고독이라는 것도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을 불러들여 만나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초자아라고 하는 것도 실상은 내 속에 들어앉은 다른 사람의 눈이다. 결국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면서도 그렇게 살 수 없다. 고독이야말로 이런 역설적인 상황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광장을 요즘 말로 물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이 고독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은 내면을 갖추어야 집단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우스꽝스런 행태-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저 지역주의, 권위주의, 국가주의!-를 과감하게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독은 고독한 다른 사람과 제대로 어울려 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논쟁과 설득과 연대!
가을이다. 하늘은 드높게 비어 모든 것을 다 담을 듯하다. 논에는 벼가 다 거두어지고 감나무에는 감만 매달리고 단풍은 곧 지려고 한다. 우리를 보고 고독해야 된다고 부추기는 것만 같다.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온 것이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그런데 요즘 들어서 고독이란 말이 좀 고색창연하게 들리겠다는 기분도 든다.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통신 기구와 교통 수단의 눈부신 발달로 고독을 제대로 느끼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 전과 견주어 사람들이 훨씬 고독해졌지만 잘 견디지 못한다고 해야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비탄으로의 길이건 행복으로의 길이건 간에, 고독이 인간을 자연과 대면하게 하는 일은, 그리하여 자연 앞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반성하게 되는 일은 나날이 줄어든다. 극도로 조직화되고 인공화된 오늘날의 세상에서 고독은 역설적으로 어느 때보다 더 독기를 뿜으면서 번식하긴 하지만, 내심에서 '무르익지'는 못한다. 그것은 경련적인 외침과 몸짓으로, 멍청하게 바라보는 텔레비전으로, 혹은 부질없이 오가는 컴퓨터 통신으로 얼른얼른 쫓아내야 할 마귀처럼 되어버렸다.(정명환, <<문학을 생각한다>>, 문학과지성사, 2003, 197쪽)교통 수단의 발달은 날이 갈수록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어들게 만든다. 그만큼 혼자 뭘 생각하는 시간이 없어지는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으면 비행기나 기차, 고속버스, 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바로 갈 수 있는 세상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고 혼자 공상하며 사랑의 성을 쌓고 허무는 과정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결국 고독은 더불어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 피해야 할 것이 되어 버린다. 문명이 상징하는 이 속도에게 고독은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는 적인 셈이다.
오늘날의 기술 사회는 그 성원으로 하여금 가속적으로 변하는 여건에 신속히 적응하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기술적 진보가 삶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지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뭇 사람이 쉴새없이 걸어나가고 있는데, 도중에 멈추어 서서 '나는 어디로 또 무슨 이유로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반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밀어닥치는 군중에게 치여 죽을 것이다. 궁극적 목적이 상정되지 않은 그 '진보'의 길을 걸어나가야만 그는 적자생존의 요행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한가한 시간이 자아로의 회기로, 실존적 질문의 제기로 뻗어가지 않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대중 문화의 기능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몸에 고인 생의 에너지가 여과나 승화의 과정을 겪지 않고 당장에 소비되도록, 그 순간적인 흥분이 영혼을 앗아가도록 만들어준다. 아찔한 놀이 기구, 폭력과 섹스로 충만한 영화, 광란적인 리듬의 음악 따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위의 책, 205-6쪽)이 기술 문명의 편리함을 한껏 누리는 젊은이들은 손전화로 어딘가 전화를 하거나 자판을 빠르게 두드려 댄다. 지하철 같은 데서 보면 대학생일 것 같은데 만화를 보고 있다. 우리 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만화를 봐 본 적이 거의 없으니 좋다, 나쁘다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지만 책과 비교하여 특히 그 속도감의 차이가 가장 뚜렷하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빠른 것은 깊은 생각과 같이 가지 못한다. 책을 읽는 것이 그렇듯이 앞뒤를 되풀이하여 오가며 따지고 다시 확인하는 것이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고독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만큼 개인의 정체성도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글 쓰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도 이런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느리게 혼자서 자신과 주위를 골똘하게 살펴야 글이 나온다. 그러므로 고독하지 않고서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내면은 고독해야 넓고 깊어진다.
물론 늘 무거울 수는 없다. 또 여럿이 모여 즐겁게 노는 광장도 꼭 필요하다. 사실 고독이라는 것도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을 불러들여 만나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초자아라고 하는 것도 실상은 내 속에 들어앉은 다른 사람의 눈이다. 결국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면서도 그렇게 살 수 없다. 고독이야말로 이런 역설적인 상황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광장을 요즘 말로 물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이 고독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은 내면을 갖추어야 집단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우스꽝스런 행태-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저 지역주의, 권위주의, 국가주의!-를 과감하게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독은 고독한 다른 사람과 제대로 어울려 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논쟁과 설득과 연대!
가을이다. 하늘은 드높게 비어 모든 것을 다 담을 듯하다. 논에는 벼가 다 거두어지고 감나무에는 감만 매달리고 단풍은 곧 지려고 한다. 우리를 보고 고독해야 된다고 부추기는 것만 같다.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온 것이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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