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궁둥이가 글을 쓴다!

귤밭1 2004. 10. 29. 06:37

 

책을 보다가 우리 집 식구들에게 소개하면 좋겠다 싶은 대목을 만나서 옮긴다. 영원히 젊은이일 것만 같은데 어느덧 회갑을 맞은 소설가 황석영과 평론가 최원식의 대담 가운데서 나오는 말이다.

황석영: 농담 삼아서 글은 100이면 궁둥이가 60을 쓰고, 40 남은 데서 20은 손이 쓰고, 그리고 남은 20 가운데서 10이 우연이요 나머지 10이 재능이라고 하거든요. 일단 앉아서 작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죠. 전에는 안 써지면 예술가연하고 돌아다니면서 충전하려고 애를 썼는데, 이제는 일하는 사람이니까 안 풀려도 일단 앉아서 시작을 해요.

최원식: 그렇죠. 일단 앉아서 쓰면 생각이 나잖아요. '글쓰는 행위의 발견적 성격'이랄까요, 쓰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 나와요.

황: 맞아요, 참 좋은 말입니다.

최: 그러니까 책상에 붙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글쓰는 사람들은 하여튼 책상이 고향이고 한번 고향을 떠나면 못 돌아오기 십상인데 황선생님은 돌아오셨으니(웃음) 정말 대단하신 거죠. 토마스 만이 그랬다데요. 아침에 책가방 들고 자기 집 서재로 출근했다 퇴근하고. (최원식, 황석영 대담, <황석영의 삶과 문학>, 최원식, 임홍배 엮음, <<황석영 문학의 세계>>, 창비, 2003, 17쪽)
역시 일류의 소설가가 하는 얘기라 귀담아들을 것이 가득하다. 지속적인 되풀이가 중요하다는 점(<숙달에 대하여>를 보세요)은 평범하지만 깊이 새겨 둘 만하다. 모든 일에서 규칙적인 반복은 잘하기 위한 필수적인 사항이다. 젖먹이가 자기 몸을 잘 놀릴 수 있기까지 넘어지고 쓰러지는 그 수많은 시행착오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열심히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잘하게 되고 그걸 의식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어렸을 적 여름에 매일 물가에서 놀다가 나도 모르는 순간에 헤엄을 칠 수 있게 됐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결국 자발적인 되풀이는 목적을 이루게 할 뿐 아니라 덤으로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노래의 리듬 같은 것이다. 일정하게 반복되므로 외우기도 쉽고 저절로 흥이 난다.

글도 마찬가지다. 자꾸 글을 쓰다 보면 참 신기하게도 평소에 하지 못한 생각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사실,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만으로는 글을 짓지 못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뜻이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가 있는데 이모저모로 궁리하고 따지다 보면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영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얼른 보기에는 아무 노력 없이 그냥 얻은 것처럼 보이는 행복한 표현은 평소에 많이 생각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해야 옳다.

지금까지 말한 '글 쓰기'를 '공부'로 바꾸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공부가 귀찮기도 하지만 참고 지속적으로 되풀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즐거운 놀이가 되는 순간이 틀림없이 온다. 모르던 것을 아는 것만큼 보람된 일도 그렇게 많지 않다. 자, 궁둥이가 배겨서 아플 때까지 책상에 앉아 보자. 진득하니 책상에 붙어 있으면 틀림없이 뭔가가 이루어진다고 믿고 실천해 볼 일이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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