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글 쓰기 정말 중요하다

귤밭1 2004. 11. 3. 07:39
먼저 두 개의 글을 읽어 보자. 첫째 글을 읽고 내 생각을 쓸까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고등학교 1학년생이 쓴 둘째의 글을 오늘(2004. 4. 26) 읽고 내 동지를 얻은 것 같은 기쁜 마음-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건대 안타까운 마음이라야 정확하겠다-이 들어 옮겼다.


미국 명문대 합격이 다는 아니다-콜린 박(서울대 유학상담자)

요즘 4월만 되면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특목고 유학반 학생들에 대한 기사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보통 그런 기사를 접하면 놀라움과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드러나지 않은 면이 있다.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미국의 톱 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 중 처음부터 학교에 잘 적응하며 공부할 수 있는 학생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특목고 유학반의 교육 시스템에 있다. 모 외고 홈페이지의 유학반 소개를 보면 "21세기 국제화 시대에 세계로 뻗는 한국인을 양성한다"는 취지 아래 만들어졌다고 돼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 동안 인재를 양성하기보다 무조건 명문 대학에 학생들을 많이 입학시켜 학교 이름 알리기에만 힘을 쓰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제화 시대의 인재를 양성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대학 입학 준비와 다른 게 하나도 없다. 먼저 유학반 학생들의 고등학교 성적은 무조건 톱이다.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톱 수준의 학교 성적을 원하기 때문에 'A(수)'를 쉽게 주거나 영어로 이뤄지는 강의 성적과 페이퍼는 점수를 후하게 주어 모두 우수한 성적을 받는다.

지난해 특목고 유학반을 갓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쓰기(writing)를 가르쳤던 적이 있다. 이들은 모두 미국 최고의 대학들에 합격한 상태였지만 이들의 쓰기 실력은 많이 부족했고 그중 한 학생의 수준은 심각할 정도였다. 이 학생의 에세이는 문법.표현력.구조.논리.열정, 어느 면으로 보아도 'F(가)'였다. 하지만 이 학생은 자신의 쓰기 실력이 우수하다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외고를 다니던 3년 동안 영어로 쓴 에세이에서 모두 'A'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에서 SAT I.II(미국 대학입학시험)를 준비시켜 주는데 이는 학교에서 수능시험을 가르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특목고 커리큘럼들을 보면 영어로 이뤄지는 강의도 AP 시험들(미국 대학 입학에 필수는 아니지만 톱 대학들이 선호한다)을 위해서다.

비슷한 수준의 미국 사립 고등학교의 교과 과정에는 SAT 등의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위한 과정이 없다. 학생들이 각자 알아서 준비한다. 대신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간 뒤 충분히 적응할 수 있도록 쓰기와 토론 위주의 교육에 집중한다.

현재의 특목고 유학반은 아주 우수하고 영어도 뛰어난 학생들에게 미국인이나 미국인 교포 선생님들이 3년 동안 미국 대학 입학 준비만 시키는 것이다. 사실 대학 입학은 뛰어난 인재가 되기 위한 100m 달리기에서 약 50m만 뛴 것인데, 나머지 50m는 상관없다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SAT I.II, AP 시험 점수와 학교 성적이 거의 완벽해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명문 대학에는 들어갔으나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돌아오거나, 또는 조금 더 낮은 수준의 학교로 편입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프린스턴대학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한국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한 학생은 "아무리 써도 끝이 없는 리포트들과 미국식의 토론 방식에 도저히 익숙하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비록 잘 버티고 있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힘들게 공부하고 있다. 스미스대학에 유학을 간 한 학생은 교수가 "이것도 글이냐. 네가 어떻게 우리 학교에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내일까지 다시 써와라"며 야단을 쳤다고 한다.

인터넷중앙일보의 나도 한마디에 특목고 학생들의 미국 대학 입학 기사에 대한 어느 독자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됐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문 대학 합격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니…"라는 지적이 인상 깊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인재를 키우기 원한다면 똑똑한 학생들을 데려다 시험만 잘 보는 기계를 만들어 미국의 명문 대학에만 보내는 교육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그보다는 미국의 어느 대학에 들어가든 미국에서의 생활과 대학에서의 공부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21세기 국제화 시대에 세계로 뻗는 한국인을 양성한다"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2004. 04. 15 18:18 입력 / 2004. 04. 15 18:20 수정(원문)


제대로 된 국어 교육 받고 싶어-이채린 학생기자(서울 양재고 1)

중학교 때 미국에서 1년 동안 학교에 다녀본 적이 있다. 미국에선 국어과목을 '문학'과 '언어'로 나눠 수업했다. 문학 시간엔 먼저 책을 읽은 뒤 내용을 놓고 토론한다. 토론이 끝나면 느낀 점을 적고, 그 글을 각색한 영화가 있으면 감상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글에 몰입하게 돼 어휘력이 절로 늘고 독후감이 잘 써졌다. 한마디로 수업이 흥미진진했다.

우리나라의 국어 교육은 어떤가. 입시에 맞추다 보니 중, 고등학교 과정 모두 단조롭기 그지없다. 글을 제대로 음미하기에 앞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단 구성을 엄격하게 나눈다. 그러고 나서 각 부분에 해당하는 요지를 적고 문체나 글의 특징 등 세부 사항을 정리해야 한다. 학생들은 단순 지식을 암기해 다섯개의 문항 가운데 하나의 정답을 고르는 골치아픈 문제 풀이를 반복해야 한다. 이쯤 되면 새로운 글을 접할 때 흥분과 희열, 호기심, 상상력이 발동될 여지가 없다. 그러니 모국어를 배우고 문학적 상상력을 키우며 즐거워야 할 수업 시간이 무미건조하고 답답해진다. 입시 성적에 얽매일 수밖에 없어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교사도 학생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학문의 기본이라며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글을 써볼 기회를 얼마나 주고 있는가. 일년에 한두 번 백일장에 나가 끄적여보는 게 고작이다. 국어를 좋아하는 학생들,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학생은 그래서 염증을 느낀다. 진정 글의 맛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이 그립다.

2004. 04. 26 17:25 입력 / 2004. 04. 27 09:02 수정(원문)
먼저, 위에 쓴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확실히 해 두고 얘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특히 우리의 국어 교육의 실상에 대해 "글을 제대로 음미하기에 앞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단 구성을 엄격하게 나눈다"고 하는 데서는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앞선 나머지 교실의 모습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없지 않지만 나로서는 모를 뿐만 아니라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과는 초점이 좀 다르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도록 하겠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 글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합리적인 핵심-글 쓰기가 정말 중요하다-에 대해서다.

좀 우회하여, 지난 국회의원 선거를 되돌아보자. 그 전의 선거에 비해 가장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토론회에 나와서 말을 잘하는 것이 바로 득표와 연결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사무국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어록이 돌아다닐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그게 득표율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물론 말만 잘한다고 해서 그 당의 득표율이 그 당을 찍은 사람들 자신이 놀랄 정도로 높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당이 하나같이 선정적으로 논 것에 비해 유독 민노당만이 이념과 정책을 가지고 투표권자에게 접근했고, 또 상대적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유권자의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해야 옳은 진단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말을 조리있게 잘하는 것이 앞으로 선거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징후를 드러낸 선거였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합리적으로 갈수록 학연이니 지연이니 하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기준보다는 말을 가지고 평가하는 쪽으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개인 주체의 합리적인 판단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앞에서 든 말을 글로 바꿔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물론 말과 글은 다르다. 말을 잘한다고 해서 글도 잘 쓴다고 할 수는 없다. 말을 하는 데는 듣는 사람이 있으니만치 글을 쓸 때보다 자신감도 필요하고 분위기도 잘 이끌어야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알맹이보다 수사가 사람을 사로잡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과 글을 잘 부리는 것은 대체로 같이간다.

그러니 교육 현장에서는 글 쓰기가 어느 공부보다 우선해야 한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혹시 공부와 글 쓰기를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것같이 읽힐 수 있으므로 안 되겠다. 글 쓰기 자체가 진짜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 질과 관계 없이 글을 쓰자면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공부가 아니고 뭔가! 당장 글 쓰기를 독립 교과목으로, 그렇지 못하면 국어 과목의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대접해야 마땅하다.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갖도록 하자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교육이 안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외면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유행에 민감하며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들로 자랐다. 이런 부정적인 현상이 전적으로 글을 안 쓰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물론 폭력적인 단순화이지만 교육 현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외국의 명문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좋은 것도 변질되어 버리는 것일까? '솦속의 학교'를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에 이런 학교가 도입되면 틀림없이 숲에서 '책 공부'를 가르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쓰게 웃었다-이 아니라 즐겁게 글을 쓰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있기는 하다. 되풀이하여 쓰는 것, 이게 답이다. 이렇게 되자면 숲속의 학교에서 하듯이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부모와 꼭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인격을 갖춘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글 쓰기의 문제는 내가 늘 주장하는, 자율적인 개인 주체의 형성이라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주체적인 개인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주체의 편협함을 넘어서 보편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언제 마련될 것인가?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