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관용

귤밭1 2005. 1. 16. 11:02
어제(2005. 1. 15) <<한겨레>>에 실린 책 소개 기사 가운데 음미할 만한 대목이 있어서 옮깁니다. 핸드리크 빌렘 반론이란 이의 책 세 권이 번역된 것을 알리는 기산데, 여기에 인용하는 것은 <<관용>>이라는 책의 구절입니다.

"관용을 위해 싸웠던 이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신념엔 의심이 섞여 있었다는 것.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도 있었지만 그 생각이 철저한 확신으로 굳어지는 지경에는 결코 이르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세상에서 진짜 쓸모 있는 것은 모두가 합성물인데, 신념만 예외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우리 '확신'의 밑바탕에 '의심'이라는 불순물이 어느 정도 들어 있지 않는 한, 우리의 신념은 순수한 은으로 만든 종처럼 경망스러운 소리를 낼 것이다."(기사 전문)
나도 이를테면 <진리에 대하여>에서 회의를 모르는 광신의 무서움을 얘기한 적이 있고, 최근에는 어떤 분의 멋진 독후감에 대해 대꾸하면서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태도 속에는 거의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절대적인 것과 관련이 없거나 반대되는 것을 배제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깃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글과 비교하여 읽어 보니까 서로 비슷한 얘기를 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내용을 실어나르는 문장의 질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부끄럽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열심히 읽고 생각할밖에요.

며칠 전에 회의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가 발언하는데 맹목적인 믿음이 너무 지나쳐서 참고 듣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실시해 보지도 못한 일을 두고서 오로지 평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가를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몰론 내가 옹호하는 정책이어서 그의 발언을 깎아내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쪽에도 장점과 더불어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 발언자도 달리 생각한다고 하면서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으로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저런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되는 건가고 신기해 했습니다. 하도 불쌍하게 보여서 연민의 눈길을 한참이나 보내야 했습니다.

신들만 사는 곳이 있다면 아마 그곳에서는 관용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절대적인 존재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계는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잘못할 수 있다는 점을 겸손하게 그리고 흔쾌하게 인정하고, 틀리다기보다는 다르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봐야 합니다. 이게 관용입니다.

물론 관용에는 타자를 포용하는 폭넓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관용의 태도를 지니지 못한 것에 대한 매서운 비판과 필요하면 항거도 있어야 합니다. 관용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절대성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믿음이나 조직이 독재 체제를 닮아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요.

결국 늘 의심하고 반성하라는 말로 요약될 것 같습니다. 특히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가끔씩 그 근원을 파고 들어가 질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일 수도 있는데, 사실은 정말 중요한 일일수록 아무 생각 없이 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하루 세 끼 밥 먹는 일. 식사할 때마다 고민하면 미친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일년에 몇 번은 왜 꼭 시간에 맞춰 밥을 먹어야 되는 거냐고 물어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되고, 나와는 다르게 먹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거지요.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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