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받아쓰기투와 번역투의 문장

귤밭1 2005. 1. 6. 13:26
평생교육원 논리논술 시간에 강조했던 얘기가 신문에 나왔길래 옮깁니다. 특히 신문 기사에서 '이와 관련, 정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와 같은 문장에서 밑줄을 그은 데서 보듯 한자에서 온 명사와 접미사인 '하다'가 결합하여 동사가 되는 경우에 어미인 '하다'의 활용을 아예 생략하여 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향 때문인지 보통의 글에서도 흔히 만나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학회지에 투고된 논문을 심사하다가 이런 문체를 보고 고치라고 요구한 적도 있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어엿한 하나의 문체로 굳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일상화되어 있지요. 물론 우리말의 용법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래에 인용하는 기사는 바로 이런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미의 사용과 관련해서, '열세에도 불구, 착실히 따라잡은 뒤' 같은 경우에 밑줄 그은 부분을 '열세에도 불구하고'보다는 '열세인데도'로 바꾸자는 것도 평소에 내가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미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미를 적절하게 잘 쓰면 문장이 자연스럽게 잘 읽힙니다. 이런 것은 말을 할 때는 잘하는 것인데 글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과 글이 같이가는 것이 좋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

받아쓰기투


여러 인물들의 회견, 대담을 기자들이 듣고 적거나, 학생들이 교사의 강의를 듣고 요점을 정리한다. 국회의원들이 행한 연설을 받아적는 ‘속기록’도 있다. 두루 ‘받아쓰기’ 결과다. 녹음·사진기가 있지만 오래갈 글쓰기 방식이 아닐까 싶다. 말·글이 같이가는 우리는, 형편이 다른 중국·일본에 견줘 무척 편한 언어생활을 누린다. 이른바 ‘언문일치’ 조건이 걸맞은 까닭이다.

마냥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신문·방송기사에서 받아쓰기 변종투가 나오는 폐단을 살펴보자.

△이와 관련, 노사정 5자 회의가 ~ △군부대 조성과 관련, 터 선정을 재검토하라 △연구원을 설립, 산·학·연 벨트를 만들어야 △우수 학생들을 선발, 인재를 길러내야 △고려궁터를 비롯, 항몽역사가 담긴 ….

이밖에도 “채택, ~/동원, ~/마감, ~/선언, ~ ”들처럼 주로 한자말로 분지른, 속기·메모 글투를 숱하게 볼 수 있다.

‘-하여·-해·-해서’는 이름씨에 붙어 풀이말을 만들고, 마디를 이끄는 구실을 하는데, 이것이 없으면 말이 순해지지 않는다. 주로 한자말로 끊는 데서 오는 폐단의 하나다.

이는 ‘이와 관련해, 비롯해’처럼 ‘-해’를 갖춰 써야 할 터이며, ‘설립,’은 ‘세워’, ‘선발,’은 ‘뽑아’로 하면 한결 아귀가 맞아든다.

△9대5로 격파, 3연패로 몰아넣었다 △3대2로 낙승, 기분좋은 3연승을 달렸다 △열세에도 불구, 착실히 따라잡은 뒤 … 들도 ‘격파’는 ‘눌러·깨고’, ‘낙승’ 역시 ‘이겨·제쳐’, ‘열세에도 불구’는 ‘열세인데도’로 바꿔쓰면 이른바 ‘범칙’을 하지 않고 개운하게 넘어갈 수 있다. ‘쉼표’가 말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물며 이런 받아쓰기 변종투가 번져 연설이나 방송에서도 들려서야.

최인호/교열부장(원문)
옮기는 김에 번역투의 문장에 대한 좋은 지적도 인용합니다.

"국어 교과서에는 한문과 일본어 번역투에 비해 영어 번역투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 중에서도 전치사구의 전이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났다."

김정우 경남대 교수는 최근 배달말학회의 학회지 「배달말」에 기고한 '국어 교과서의 외국어 번역투에 대한 종합적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초.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51종에 나타난 번역투 문장의 유형을 분석했다.

그는 "번역투란 직역의 번역 방법으로 산출된 번역문에 존재하는 원문 외국어 구조의 전이 흔적"으로 정의하며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모국어의 자연스러운 문장 규칙을 깨뜨리는" 수동적인 번역투 문장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특히 "영어의 전치사구가 국어 문장에 전이된 용례는 상당히 다양하게 조사됐다"고 말했다.

일례로 ▲그 사람으로부터 잘잘못을 들은 다음..(중학 생활국어 2-2 103쪽) ▲누나와 나는 할머니로부터 무섭게 지청구를 먹어가며..(중학 국어 2-1 146쪽) ▲웃음의 유일한 기능은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이다(초등 읽기 6-1 97쪽) 등의 문장에서는 "시원(始原)'을 나타내는 영어의 전치사 'from'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

그는 이 문장들은 각각 ▲그 사람에게(서) 잘잘못을 들은 다음.. ▲누나와 나는 할머니에게(서) 무섭게 지청구를 먹어가며.. ▲웃음의 기능은 '긴장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다 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로운 변형의 멋도 선보이고(중학 국어 1-2 170쪽)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중학 국어 1-2 232쪽) 등의 문장은 영어 전치사 'through'를 번역한 것이고, ▲문자 언어는 필요에 의해서 오랜 기간을..(중학 국어 1-1 213쪽) ▲제일 긴 그 다리가 폭격에 의해 아깝게 끊어진 뒤로는..(중학 국어 2-1 143쪽) 등의 문장은 전치사 'by'를 번역한 흔적이 짙다고 분석했다.

이들 문장은 각각 ▲이번 기회에..새로운 변형의 멋도 선보이고 ▲작가가 이 소설 속에서 말하고자 한 것.. ▲문자 언어는 필요에 따라 오랜 기간을.. ▲제일 긴 그 다리가 폭격으로 아깝게 끊어진 뒤로는.. 으로 고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김교수는 밝혔다.

김교수는 이외에도 영어의 소유 구문을 나타내는 동사 'have'가 그대로 번역된 듯한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고등 국어 상 84쪽)', 수동태 구문 형식이 그대로 드러난 '아이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창작된 놀이(중학 생활국어 2-2 91쪽)' 등 문장도 영어 번역투 문장으로 지적했다.

그는 이를 '사랑하는 처자가 있는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아이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창작한 놀이'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영어 번역투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한문과 일본어 번역투 문장도 존재했다면서, 한문의 기능어 '인(因)'과 '사(使)'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는 문장으로 '소리로 인해 고통받는 내 심정(중학 국어 2-1 27쪽)', '그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중학 국어 1-1 134쪽)' 등을 들었다.

그는 이들 "번역투의 유형은 두 가지뿐이었지만 빈도는 상당히 높게 나왔다"면서, 이를 각각 '소리로 고통받는 내 심정', '그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으로 수정했다.

일본어 번역투로는 '닫혀진 약국(중학 국어 1-2 36쪽), '잘리어진 나이테(고등 국어 상 29쪽)', '이 글이 잘 짜여졌는지(고등국어 상 181쪽)' 등을 지적했다.

김교수는 이는 "피동사를 만드는 접미사 '-이, 히, 리. 기'와 통사적 피동구조 '-어지-'가 중복된 이중피동 형태"라고 분석하며, 이들은 '닫힌 약국', '잘린 나이테', '이 글이 잘 짜였는지'로 쓰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국어 교과서가 우리의 언어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라면서 "국어 교과서의 문장은 여러 가지 기준에서 '모범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기사)
나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이 학자가 말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고, 또 번역투라는 지적이 맞다고 해도 어떤 유형은 많이 쓰이고 있으므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꼭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내용입니다.

이 가운데서 '이 책은 잘 읽혀진다'에서 보듯이 이중 피동의 형태는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므로 당연히 쓰지 말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 심한 것으로 방송 같은 데서 천연덕스럽게 '생각되어집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원래 피동은 타동사에만 쓸 수 있는 것으므로 그 자체로 피동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자동사에 다시 피동의 뜻을 덧씌우는 꼴이므로 도대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것으로 통용되는 것 가운데도 조금만 의식하면 어색하게 들리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평소에 그런 예로서, 위의 기사에서 그대로 가져오면 '소리로 인해 고통받는 내 심정'에서 쓴 '인(因)하다'를 듭니다. 우리말을 의식적으로 쓰고 있는 <<한겨레>>에서도 많이 보이는 말툽니다. 나는, 어미를 조금 손보든지 쉬운 말로 아주 자연스럽게 바꿀 수 있으므로 이런 말은 쓰지 말자고 늘 강조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정확하고 쉽게 내 뜻을 전달하는 것이 글의 목표일 텐데 필요하지도 않은 곳에서 어색한 말을 굳이 동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통하다'나 '의하다' 같은 것도 '인하다'와 마찬가지의 경우라는 점을 오늘에야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쓰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책 속으로 난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용  (0) 2005.01.16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  (0) 2005.01.13
가슴을 뛰게 하는 일  (0) 2004.12.31
연기  (0) 2004.12.27
어떤 주례사  (0) 200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