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나를 위해 무엇을 하거나 가지고 싶다는 욕망 - 쉬울 것 같죠? 의외로 안 쉽답니다. 내가 뭘 즐거워하는지 아는 자기파악 능력, 그리고 스스로를 정말로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실천 능력이 있어야 하죠. 내가 나 스스로를 ‘접대’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당신을 먼저 대접해주지 못하니까. (임경선, <그 눅눅한 느낌 이제 놔주세요>, 전문)내가 소중하다. 이게 난 모든 상담의 밑바탕을 이루는 핵심어라고 생각한다. 내가 소중하다면 자학에서 자유로워져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엄살을 부리지 않을뿐더러, 남도 나처럼 소중한 존재이므로 남을 괴롭히지도 않게 된다.
단골이라는 개념은, 주인과 손님 모두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오래된 단골 가게가 즐비한 마을공동체가 현재와 같은 위험 사회의 적절한 대안일 수 있다는 사회학적 진단은 그래서 심리적으로도 더없이 타당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중략)
심리적인 측면에서, 나에게 있어 나만큼 오래된 단골은 없지 않나요. 그러므로 가장 먼저 배려하고 환하게 웃어주고 안부를 물어주어야 할 내 최대의 단골은 나일 수밖에요. (정혜신, <단골과 덤>, 전문)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자학과 객관적인 자기 인식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다른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취하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남에 대한 오지랖 넓은 간섭을 곧잘 사랑이라고 우기곤 하는 것이다. 흔히 듣는 '사랑의 매'를 생각해 보라.
체벌은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상대를 열등한(약한) 존재로 여기고 둘째는 그런 상대를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니까 체벌의 교육적 효과에 대한 찬반 논쟁은 흔하게 벌어지나, 첫째의 조건에 대해서는 잘 따지지 않는데 나는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뚤어진 인간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인간관의 요체는 성인 중심주의랄까 그런 것인데 쉽게 설명하자면 어른이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므로 때려도 되고 사람으로서 누려야 하는 권리도 어른이 되기까지는 유예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어른의 종속물이므로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게 체벌의 근거이다. 동등한 처지의 선생들끼리는 체벌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근거가 얼마나 단단하게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무의식인 것이다! 혹시 선생들 사이에 체벌이 이뤄진다면 누구의 눈에도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그냥 폭력으로만 보일 것이다. 학생이나 전문가가 선생을 평가하여 낮은 점수가 나온 선생에게 잘 가르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학생이나 학부모가 매를 들겠다면 선생이 성적이 낮은 학생을 때리는 일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굳이 그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월한 쪽(강자)이 열등한 쪽(약자)을 향해 매를 든다는 점만 확인하면 된다.
성적이 안 좋으면 왜 그런지를 같이 고민하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게 사랑이다. 수업을 방해하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옳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듯이 마음에도 처방이 필요하다. 그런 걸 때린다고 풀리겠는가. 교실이 조용해진다고 해도 그건 임시처방일 뿐이고 원인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한 반의 학생 수를 대폭으로 줄이고 매를 대신할 전문가를 학교마다 배치하도록 해야 한다. 책 공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앞에서 수업 방해를 학생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읽히게끔 썼는데 온전한 사람이라면 하루 종일 교실에 앉아 있는 시간을 못 견뎌해야 맞는 거 아닌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젊음이 용솟음 치는 나이인 것이다. 책 공부 중심으로 가면 학교와 학원은 구별되지 않는다. 학교는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을 키우는 데다. 체벌 금지는 이런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과 함께가야 성공할 수 있다.
매가 무서워서 뭘 하게는 하지 말자. 노예근성을 키우는 일일 뿐이다. 제대로 잘 할 수도 없다. 맞는 데 익숙하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때리는 데도 익숙해진다. 폭력의 악순환이 벌어진다.
마음에 안 들더라도 말로 하자. 말로 해서 안 되는 것은 때려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으로 듣는 것 같아도 병만 키울 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매 덕분으로 달라졌다는 얘길 하는데 굳이 매가 아니어도 이미 뉘우친 경우이다. 사랑을 담은 따뜻한 말-꼭 듣기 좋은 말이어야 할 필요는 없고 따끔한 비판도 포함한다-과 자발적인 행동이 어우러지도록 해 보자. 하고 싶어서, 즐거워서 무슨 일을 하도록 부추기자. 그래야 내 삶에 내가 있다. 저마다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가치의 다양화를 위해서도 어른들의 인내와 격려는 필수적이다.
다시, 내가 소중하다. 남도 그 당사자에게는 물론 '나'다. 이런 걸 마음에 두면 체벌은 금지하여 마땅하다.
* 체벌을 다룬 글은 여기, 여기, 여기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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