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여름방학 1차 도보여행-지리산 둘레길(2010. 6. 29-7. 1)

귤밭1 2010. 7. 20. 08:52

드디어 오늘(2010년 6월 29일) 도보 여행 떠납니다. 지리산과 섬진강 쪽만 대강 정해 놓고 발 가는 대로 돌아디니려고 합니다. 일단 아침에 기차를 타고 남원에 가서 지리산 둘레길로 갑니다. 그 다음의 여정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입니다.

처음에는 아예 차를 안 타고 집에서부터 지리산까지 가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자동차 다니는 큰길을 걷는 것은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차가 많이 안 다니는 길이 있기는 있을 텐데 그걸 찾는 것도 귀찮고요. 이제 서울에서 지리산까지 사람이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은 안 남아 있을 거예요. 슬픈 일입니다. 문명의 발전이라는 게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대가로 자연과 몸의 직접적인 관계를 가로 막기도 하지요. 나는 구식이어서 그런지 자연과 함께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몇 년 전에 경기도 안산에서 목포까지 걷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걷기 여행을 못 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시간을 들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땡볕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 찬물에 몸을 씻을 때의 그 시원한 기분을 그리자니 벌써 가슴이 설레고 날아갈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몸이 전과 같지 않은데 잘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지치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낮잠도 자고 하면 되리라 믿습니다.

지난번에 동료들과 함께 송광사에서 선암사까지 조계산을 걸었는데 그들과 얘기하면서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 냈습니다. 어떤 이가 산을 오르는 데 힘이 든다고 했습니다. 물론 나도 그랬지요. 그러면서도 무척 즐겁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무들을 보니까 초봄의 연두색 이파리가 이쁘기는 하지만 여름의 짙은 녹색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과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내 동료는 힘든 것은 힘든 것이라면서 나중에 다 오르고 나서 그런 기분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즐거운 고통도 있는 법이라고 대답해 줬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게 즐거움을 잘 느끼는 능력이 있는 거라고 혼자 좋아했습니다.

아무튼 즐겁게 걷겠습니다. 여러분한테 날씬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 걷고 배 좀 들어가라고 응원해 주세요. 문자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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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무사히 잘 마쳤어요. 저녁 먹은 다음에 숙소 정하고 몸 씻고 빨래 간단히 하고 이렇게 피시방으로 나왔어요. 좀 지치기는 하지만 몸은 이상이 없고 기분은 좋아요. 낮에 땀을 많이 흘린 대가라고 생각해요.

용산역에서 9시 10분 고속전철 타고 출발해서 익산역에서 전라선으로 갈아타서 남원역에 12시 24분에 내렸어요. 시내버스 타고 버스터미널에 갔는데 거기에는 우리 국문학과의 주부 학생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 보고 싶다길래 염치 없이 남원으로 오라고 했지요. 지난 겨울에 들러서 맛있게 먹은 적이 있었던 식당에서 추어탕 대접했습니다. 차 마시자는 걸 바쁘다면서 뿌리치고 주천으로 가는 시내버스 탔지요. 오늘은 주천에서 운봉까지 13킬로미터의 여정입니다. 첫날이기도 하고 오후에야 걷기 시작하니까 아주 맞춤한 길이의 길이였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땀이 쏟아지는 거 있지요. 평소보다 더 더운 느낌이었어요. 산 쪽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자 오르막이어서 숨이 턱턱 막혔어요. 몸을 움직이지 않고 집에만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기분은 괜찮았습니다. 찬물로 몸을 씻을 저녁의 상쾌함을 떠올리는 일도 기분을 돋구는 데 한몫했지요. 거기다가 우리 학생들이 중간중간에 격려 문자 보내 줘서 힘이 났어요. 내가 부럽다면서 도보여행 해 보고 싶다고 했는데 걷는 것은 특별한 재주가 필요 없고 그저 해 보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처음에는 몸의 여기저기가 쑤시고 발에 물집도 생기고 해서 힘이 들지만 좀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기쁨과 즐거움만 느끼면 됩니다. 오늘 출발하면서 얘기했듯이 사실 걸으면서 겪는 고통은 즐거움을 더 크게 하기 위한 양념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2시 좀 지나서 걷기 시작했는데 6시 10분쯤 운봉에 도착했습니다. 중간에 200년된 느티나무 밑에 평상이 있었는데 거기서 한숨 자기도 했습니다. 나무는 대단해요. 200년이 되었는데도 싱싱하니 말입니다. 그늘에다 시원한 바람까지 선물로 줍니다. 이러니 걷는 게 고생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겠지요? 운봉에는, 대충 살펴봤더니 잘 곳이 없어서 버스 타고 다시 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다시 운봉으로 가서 둘레길 계속 걸으려고 합니다. 하루 종일 걸어야 하므로 오늘보다는 고생하겠지만 시작이 좋았으니 내일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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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월 30일)은 지리산 둘레 2코스와 3코스, 그러니까 운봉에서 인월을 지나 금계 마을까지 29킬로미터를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걸었어요. 아침에 구름이 끼어 걷기에 맞춤한 날이라고 좋아라 했는데 웬걸 낮이 되니까 햇빛이 쨍쨍한데가 기온이 높았는지 어제보다 더 덥더라고요. 오르막 길에서는 힘이 부쳐서 기듯이 했답니다. 그래도 몸은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그 동안 몸에 쌓였던 찌꺼끼가 땀으로 다 나간 것 같아 기분도 좋고요. 2리터쯤 물을 마셨는데 땀으로 다 나와 버렸는지 오줌도 안 마려웠어요. 땀이 비오듯 한다는 것이 과장이 아니더라고요.

내일은 4코스와 5코스를 걸을 건데 처음으로 가는 곳이에요. 26킬로미터쯤 되는데 오늘 잘 했으니 내일도 문제 없겠지요?

걷다 보면 제일 고마움을 많이 느끼는 데가 발이에요. 쉬면서 양말을 벗고 만지면 말랑말랑한데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는지 하루 종일 꿋꿋하게 견디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어요. 몸의 어딘들 가만히 놀겠습니까만 그래도 발만큼 고생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발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도 못하지요. 사회에서도 그렇지요. 가장 고생하는 사람들이 최고로 대접받기는커녕 천대를 받기 일쑤니 말입니다. 이를테면 농부들이 그렇잖아요?

이 뙤약볕에도 농부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고사리밭에서 잡초를 뽑는 분들이 많이 보였어요. 지나가면 오히려 그 분들이, 여름에 걷느라고 고생한다고 인사를 건네는데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요. 내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저 나이 드신 분들의 일에 대면 어리광 부리는 수준에 지나지 않지요. 삶이 만만치 않으며 그만큼 엄숙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끔 아이들과 같이 여름에 도보 여행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요즘 아이들이야 공부를 빼면 고생을 모르고 자라니까요. 억지로 하는 공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도 여행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문자 많이 받았어요. 고마워요. 이렇게 사람은 어울려서 사는 건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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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월 1일)도 잘 걸었어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빗방울 듣는 소리에 잠이 깨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밖을 보니 부옇게 흐리기는 한데 비가 많이 내린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걸으러 갔는데 비가 오면 심시가 복잡해져요. 집으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비까지 맞으면서 궁상맞게 걸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지요. 6시가 채 못 되었으니까 누운 채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일단 아침을 먹고 보자고 결정했습니다. 어제 저녁 먹으면서 식당 주인에게 물었더니 아침 7시에 문을 연다고 해서 거기로 갔습니다. 그때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순대국밥을 먹고 나자 비가 그쳤습니다. 소나기였는가 봅니다.

버스를 타고 어제 마친 곳으로 갔습니다. 금계 마을의 맞은 편에 있는 의중 마을인데 4코스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전에도 이 코스가 있었는데 중간(벽송사)에서 주민들의 반대로 끊기는 바람에 계속 이어지자 않아서 불편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 보니까 새로 길을 냈더라고요. 강(엄천)의 계곡을 따라 난 산길이었어요. 나무 그늘도 있고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는데 혼자니까 호젓했습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몹시 더워서 숨이 턱에 차 오르고 구슬땀이 흘러내렸어요.

한 시간쯤 걸었을까요, 산길이 끝나고 포장된 도로가 나왔어요. 여전히 강을 따라서 갑니다. 마칠 때까지 이런 길이었습니다. 차가 거의 안 다니니까 괜찮았습니다. 중간에는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그네의 눈으로는 예산의 낭비로만 보였습니다. 깨진 바위가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안타까웠습니다(사진 1, 사진 2 보세요). 사라진 나무와 풀은 얼마나 많을까요?

중간에 쉼터가 보이길래 잠깐 쉰다는 것이 자고 말았습니다. 깨 보니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았습니다. 보통 때는 맛보기 어려운 달디단 낮잠이었습니다. 점심 시간에 맞춰 4코스의 종점인 동강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오래된 팽나무 당산에서 땀을 들이고 점심을 사 먹었습니다.

5코스는 지도를 보니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올라가는 것은 괜찮은데 내려오는 것은 싫습니다. 다리에 충격이 많이 가서 무릎 관절이 힘겨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도 산에는 잘 가지 않습니다. 지도에 난 길을 버리고 그냥 강을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는 것도 도보 여행의 즐거움입니다.

산딸기랑 오디를 따 먹으며 걸었습니다. 이쪽의 산딸기는 맛이 있었습니다. 단맛에 익숙해져선지 어릴 적에는 그렇게 맛있었던 자연산 열매가 이제는 심심해져 버렸는데 이쪽의 산딸기는 안 그랬습니다. 한 움큼씩 입에 넣으면 절로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가고 있는데 트럭이 멈췄습니다. 40대의 부부인 듯한 두 사람이 탔는데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둘레길을 걷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이 길이 아니라면서 그곳으로 태워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냥 강을 따라간다고 대꾸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걷다 보면 저런 친절한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그런데 좋은 차를 탄 사람은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습니다. 고생깨나 했을 듯한 이들이 손을 내밉니다. 몸으로 겪어 봐서 힘이 든다는 것을 아는 거지요. 동정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군대 가서, 높은 사람들이 점심 시간에 저들은 식당에다 맛있는 밥을 시켜 먹으면서도 심부름을 하느라 때를 거른 졸병들에게 인사로라도 같이 먹자는 얘기 한 마디도 안 하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억울한 심사를 내뱉는 나도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아주 소중한 능력입니다. 이런 태도는 아무래도 몸으로 배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편해지면, 한때는 절실했던 몸의 기억을 잊어먹게 됩니다. 저 장교들도 그 시절에 해군사관학교에 갈 정도였으면 어렵게 살았을 텐데 위치가 달라지면서 어느덧 졸병을 헤아리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걷다가 하루 여정을 끝냈습니다. 내일은 비가 온다기에 여름방학 1차 도보 여행은 이것으로 접기로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집 식구들이 문자나 전화로 응원해 주셨는데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 올립니다. 돌아오자마자 또 어디로 떠날까만 궁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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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세요. 몇 장 못 찍었어요.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사진 8, 사진 9, 사진 10

 

사진 설명 좀 할게요. 1번과 2번은 어제(7월 1일) 걸은 길이에요. 1번은 지도에 표시된 길을 걸었지만 2번에서는 산을 지나가는 데라 내려오는 게 성가셔서-내려오는 것이 힘이 들어서 산에는 잘 안 가게 돼요- 그냥 강 따라 내려갔어요. 포장됐지만 차가 거의 안 다니니까 좋았습니다.

여기서 정보 하나 알려 드릴게요. 강을 따라서는 보통 옆으로 두 개의 길이 나 있어요. 그런데 한 쪽 길은 차가 잘 안 다녀요. 이런 쪽을 고르면 걷기가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그 동안의 짧은 경험에 기대어 하는 말이니까 다 믿지는 말고 참고만 하세요. 어제 오후의 길이 그랬습니다.

3번과 10번, 그리고 9번은 오디와 산딸기입니다. 요즘이 이들이 한창 익어 가는 철입니다. 나는 시골 사람이라 저런 것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따 먹어야 합니다. 하나씩보다도 손에 가득 모아놓고 한꺼번에 먹어야 제 맛이 납니다.

내 사진도 보세요. 6번은 저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 줄 모르고 찍었는데 사진으로 보니까 꽤 생생한 느낌을 주는데요. 여러분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7번과 8번은 왜 올렸는지 궁금할 거예요. 걸어 보니까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데 저렇게 바위를 쪼개 가면서 포장 공사를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보여 드리는 거예요. 이 정권이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4대강 사업을 떠올렸습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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