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귤밭1 2005. 10. 24. 13:39

<<한겨레>>에 금요일마다 실리는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연재를 나는 빼지 않고 꼭꼭 읽는다. 바빠서 보지 못할 때는 따로 챙겨 두었다가 한꺼번에 읽는 재미를 누리기도 한다. 자전거를 못 타는 바본데도, 도보 여행을 한번 한 이력이 같은 여행자를 그냥 지나치게 하지 않는 것 같다. 인터넷(주소는 아래 인용문 다음에 나와 있다)으로도 읽을 수 있으므로 한번 들여다보기 바란다.

 

여행기라 보통의 미국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엿볼 수 있어 재미도 있거니와 배울 것도 얻는다. 특히 미국인들의 독립적인 태도랄까 이런 것은 부럽기까지 하다. 일반 가정에서 아이는 고교를 졸업하면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꾸려야 하는 모양이다.

스무 살인 장남 라이언은 고교를 졸업했을 때 독립을 강요당했다. 부모는 만약 집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집세를 내라고 해서 그를 쫓아냈다. 대신 1천600만 원짜리 집 한 채 사서 독립할 곳을 마련해줬다. 지금부터는 학교를 다니든 말든 혼자 힘으로 꾸려가야 한다고 했다. 며칠 동안 꾸물거리며 독립을 회피하던 라이언은 마침내 새 집에 안착했다. 그는 저녁식사도 초대해야 와서 먹을 수 있는데 오늘은 초대를 받았다.

 

미국 평범한 가정의 자녀들은 고교를 졸업하면 재정적으로 독립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게 미국이 딴 나라와 다른 특징이다. 영국도 이렇게까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미국도 상류사회에 올라가면 부모의 덕을 보는 경우가 많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 실례이지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전통은 보통사람들 가운데서 확고하다. 라이언은 대학 1학년을 중퇴하고 지금은 일자리를 못 찾아 아버지 밑에서 일하고 있다. 고속도로순찰대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버지 잉겔스가 “고교 졸업하면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그랬다”고 말하기에 어떻게 독립했는지 물어보면서 그의 놀라운 인생사를 들을 수 있었다. 잉겔스는 모터싸이클 프로 선수였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무대에서도 활약했다. 스피드웨이가 주종목으로 400m 코스를 네 번 도는 경기다. 영국에서 활약할 당시 크리스와 결혼했는데 <비비시방송(BBC)>이 결혼식을 보도했을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크리스는 그 때 사진을 들고 와 보여줬는데 한 쌍의 왕자와 공주 같다. (중략)

 

염치없이 이틀 연속 저녁을 얻어먹으면서 그의 인생에 대해 더 들을 기회가 있었다. 첫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잉겔스가 31살 전성기에 은퇴를 결심하고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대목이었다. 갈채와 박수를 뒤로 하고 어떻게 목수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잉겔스는 유럽에서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로 돌아와 레이싱을 하는데 점점 마약에 빠져드는 것 같이 느꼈다. 점점 더 투약량을 늘려야 하듯 아무리 우승을 해도 만족스럽지 않고 그 다음날에는 다음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것. 일주일에 4번 열리는 대회를 그는 18번 연속 우승한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19번째 대회에서 일등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때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손에 집히는대로 집어 던졌다. 그 때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은퇴를 결심했다는 것.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목수학교를 다니면서 또 독학하면서 난방부터 전기시설, 지붕, 벽체, 바닥, 콘트리트 타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터득했다. 그 일을 하면서 머나먼 오지와 같은 곳인 미주리 골든 시티에까지 오게 됐다. 그러자 이발사였던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이사를 와 앞집에 살고 다른 친척도 이곳에 뿌리를 내려 점차 이 동네가 그의 집성촌이 돼간다. (홍은택,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22회, 원문)

아마 여러 조건이 미국보다 많이 나쁘겠지만 우리도 이렇게 못할 것은 없을 것 같다. 사실 많은 대학생들이 부업을 해서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부모의 정이 과도하게 흘러넘치는 것을 잘 통제하기만 하면 우리 아이들도 독립적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독립이 더 중요한 것은 온전히 주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자식이라고 해도 부모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므로 잉겔스처럼 그야말로 인생 전체를 거는 모험도 가능해진다. 늘 청춘처럼 살 수 있는 비밀이 이런 데 있는 것이다. 물론 남을 의식하거나 유행을 따르지 않는 창조적인 삶의 원천도 여기에 있다. 저마다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되므로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바탕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의 불쌍한 '기러기 아빠'(관련 기사 1, 2사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저런 미국인들은 자식의 교육 때문에 몇 년 동안 떨어져서 지내기를 마다 하지 않는 우리의 아빠와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을 위하여 왜 부모의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걸까? 부모와 자식은 똑같은 인간인데 말이다. 설사 아이가 그런 교육을 받아 나중에 잘된다 해도 희생 위에 꽃핀 그 결과가 그리 대단한 것일까?

 

우리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쏟는 관심을 지금보다 줄이고 그 시간을 자신을 가꾸는 데 들이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더구나 고독해도 좋을 깊은 가을이다.

 

 

************

 


<덧붙임>

 

 

23회도 우리 마음에 새겨 두면 좋은 구절을 담고 있다.

캔터키 주 매리온 마을 도서관에 쪽지를 남기고 먼저 떠난 앨리슨의 종적을 확인했다. 그는 문장을 직선이 아니라 원형으로 늘어놓는 특유의 인사법을 통해 “사랑이 전염병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중략)

 

냉장고에 그가 붙여놓은 쪽지를 발견했다. 꼭 유서 같다.

 

바라는 것(Desiderata)

 

소란스러움과 서두름 속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기를. 정적에 싸인 곳을 기억하기를. 가능한 한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당신의 진실을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기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심지어 아둔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귀를 기울이기를.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이야기가 있으니. 사납고 나쁜 사람들을 피하기를. 그들은 영혼을 갉아 먹으니.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공허해지거나 잠시 기분이 나아질 뿐. 세상에는 항상 당신보다 낫거나 못한 사람들이 있거늘. 앞일을 계획하는 것만큼 지금까지 이뤄낸 것들을 음미하길. 아무리 미천한 일이라도 그것이 당신이 할 일이라면 그 일에 흥미를 잃지 않기를. 시간에 따라 운은 변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변하지 않는 당신의 천직이 될 것이니. 사업을 할 때는 조심하기를. 세상에는 사기가 판치고 있으니. 그러나 이것 때문에 좋은 일들에 대해 눈감는 일이 없기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이상을 위해 분투하고 있고 영웅적인 노력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으니. 당신 자신이 되기를. 관심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 말기를.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지 말기를. 아무리 무미건조하고 정나미가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져도 사랑이야말로 잔디처럼 연중 끊이지 않는 것이니. 젊음의 것들을 우아하게 단념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기를. 갑작스런 재난에서도 당신을 지켜줄 영혼의 힘을 키우기를. 그러나 상상의 것으로 스스로 괴롭히지 말기를. 두려움의 대부분은 피로와 외로움에서 싹트나니. 엄격한 자기수양을 넘어서 자신에게 온화하기를. 당신은 우주의 자녀이니. 나무와 별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니. 당신은 여기에 있을 권리가 있거늘. 그리고 당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우주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대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으니. 그러므로 신과 융화하길. 신이 당신에게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리고 삶의 시끄러운 혼란 속에서 당신이 무엇을 열망하고 무엇을 위해 다투고 있든 간에 당신의 영혼과 조화를 이루길. 세상은 거짓과 허영과 무너진 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답거늘. 조심하기를. 행복하기 위해 분투하길.

 

(중략) 맘에 와 닿는 구절은 ‘굴복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이라는 대목이다. 우리는 생각이 다르면 원수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생각이 좁아지고 더욱 말을 나눌 사람들이 적어진다. 때로는 그게 싫어서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남한테 맞춰나간다. 그의 메시지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세상에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납고 나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기 앞서 피하라는 말도 좋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미워서 하면서 닮아간다.

 

상상의 것으로 스스로 괴롭히지 말라는 말도 내게는 적절한 충고였다.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이 끝난 뒤 뭘 할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가족도 있는데 이대로 백수로 지낼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어떤 일을 한다고 할 때 그 일이 과연 만족스러울지…. 어느것 하나 여행하는 동안에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현재의 고민이 없으면 미래의 고민을 끌어다가 한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앨리슨은 상상의 것들로 괴롭히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래, 여행하는 동안에는 여행에만 충실하자. (홍은택, 23회, 원문)

여러분의 맘을 울리거나 편안하게 해 주는 구절은 없나요?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앨리슨! 고마워요. 부디 여행 잘 마치세요. 물론 홍은택님도요.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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