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는 올해 일흔이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으로 근무하여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농사에서부터 집안 일은 거의 어머니가 책임을 졌다. 나중에는 밭을 귤 과수원으로 바꾸고 소나 돼지를 키우지 않게 되니까 곡식 농사나 소 먹일 꼴을 베고 저장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과수원이 있으니 일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요즘도, 올해만 하고 그만 둔다고 하면서 계속 과수원에 다닌다. 아마 내년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지금 어머니는 삼개월에 한번씩 서울에 온다. 퇴행성 관절염을 치료받기 위해서다. 걸어다닐 때는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차를 타기 위해서 기다리는 짧은 동안도 서 있지 못해 바닥에 앉아 있어야 할 정도다. 하루도 빠짐 없이 식사 전이니 후니 하여 시간 정하여 먹는 약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조금 과장하면 머리 나쁜 사람은 제대로 챙기기도 어려울 것이다. 약 기운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일터로 나가는 것이다. 의사가 일은 하지 말고 수영 같은 것을 해야 겨우 병이 덧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아프다면서 낫지 않는다고 의사에게 하소연한다. 그 말을 듣는 자식의 가슴이 마구 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바보 같다'는 말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자면 더 그렇다. 아프다면서 의사가 하지 말라는 일(노동)은 왜 하는가 말이다. 다른 데서도 한 말이지만 나는 결코 효자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 두어야겠다. 그런데도 어머니의 바보 같은 태도에 화가 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조금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수원도 당장 그만 두고 돈이 없으면 다 팔아서 쓰라고 한다. 자식들이 다 자라서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하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으면 못할 일도 아니다. 어머니의 반응은 다 짐작할 것이다. 생각도 못할 일이라고 펄쩍 뛴다. 조상이 물려준 재산을 어떻게 팔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가 산 것이라도 그렇게 하라고 하면 못 들은 척한다.
자식으로서 이런 어머니가 고맙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앞에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어머니의 이런 삶이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사실, 어머니의 희생에 내포되어 있는 부정적인 측면이 너무 크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어머니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도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개인 주체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그 애정이나 희생이 가족 구성원에게만 한정됨으써 가족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 대해서는 어떤 글을 옮기는 게 좋겠다.
자녀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성은 자주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자녀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려는 대리만족으로 이어지면서, 아이들이 어머니의 경쟁 도구로 바뀌기도 한다. 이 같은 일은 자녀의 행복 찾기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자녀 의존증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이런 주장에 특별히 덧붙일 것은 없다. 개인 주체의 독립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당연히 이르는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밑바탕에는 '자식은 바로 나다'라는 무의식화된 생각이 깃들어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인용한 글에서 말하는 자식을 통한 '대리 만족'도 뒤에 와서 '숨겨진 자기애'라고 한 것처럼 '자기 만족'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자식을 자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과도한 희생도 억압도 다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어머니도 자식도 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결과에 이른다. 가족을 위하여 희생한 어머니가 나중에 자기가 한 일인데도 후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기 자식이 남, 다시 말하면 독립적인 개인 주체라고 인정한다면 사정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자녀에게 애정을 쏟는 어머니는 사회적으로도 맑고 바르고 선한 존재라는 '모성 신화'는 붕괴되어야 한다. 애정이란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모성의 강조는,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연애와 결혼을 거쳐 가족으로부터 탈피해 가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로 여기게 만든다. 자녀가 결혼을 하고 자신의 가정을 꾸려도 여전히 간섭하려 든다. 모성이 전부인 여성으로부터 어머니라는 존재를 빼앗아버리면 남는 것은 빈 껍질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성이 아니라 '자기애'다. 좀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누구에게나 부여된 천부적 권리다. 우리 사회는 이 당연한 권리를 부당하게 무시해 왔다. 부인들도 이제 자기애를 숨길 필요가 없다.
남편과 자녀에 대한 희생과 헌신도 남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려는 숨겨진 자기애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애는 상대방에게 부담만 줄 뿐이며, 스스로를 옭아매는 굴레를 만들 뿐이다.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너를 위해 내 평생을 바쳤고 희생했어"라고 말하면 그 자식은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어머니는 자식이 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자식이 어떻게 만화가의 길을 꿈꿀 수 있겠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부인들도 인간이며 따라서 행복을 찾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부인이자 어머니인 여성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자신의 인생을 최대한으로 즐기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는 것이 훌륭한 산 교육이다. 자녀들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 여성이 가장 유능한 어머니다.(김지룡, <자유로운 아내가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 <<개인독립만세>>, 살림, 2000, 244-6쪽)
몹시 부끄러운 일이지만, 입양을 꺼리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삶의 실상이 아닌가! 가족의 울타리만 넘어서면 우리는 서로 무관심한 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에게 정이 있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다. 우리끼리만 그럴 뿐이다. 남에게는 그렇게 배타적일 수 없다. 언론에서 쉽게 만나게 되는, 조선족이나 동남아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좋지 못한 태도를 떠올리면 된다(마치 내 얘기의 증거를 대 주려는 것처럼 오늘 <<한겨레>>는 외국인이 산업기술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노예처럼 혹사당하는 사정을 고발하는 글 <노예가 아니라굽쇼?>를 싣고 있다. 정말로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가족 이기주의가 그 범위를 넓히면 추한 민족주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에 비해 정이 없다는 서양인들은 몸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외국의 아이들를 데려다 키운다.
물론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현상이 나오게 된 배경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양의 경우, 사회 복지 제도가 높은 수준에서 정착되어서 가족 이기주의에 매몰되는 것을 막고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정에 비해 우리 가족은 남을 돌아볼 만큼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득바득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꼭 여유가 있는 사람이 남을 배려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라면 우리 사정을 사회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책임을 회피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식도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는 것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스스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해결책이다. 먼 길이지만 여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구절을 소개하면서 마치기로 하겠다.
사랑에는 사랑을 주는 자가 그것을 받는, 흔히는 자신의 뜻과 어긋나게 받는, 자에게 자신의 뜻을 강제하게 만드는 무슨 힘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다. 사랑하면서 폭군이 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은 남자가, 그리고 질투를 느끼지 않은 여자가 어디에 있는가?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너그러운 사랑이나 사회적 이념에서 나온 높은 사랑일지라도, 그렇다. 종교 재판관들은 '마녀 사냥'으로 불쌍한 노파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면서 자신들은 그녀들의 영혼들에 대한 사랑에서 그렇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류의 이름으로'나 '인민의 이름으로'와 같은 추상적 '사람'에 대한 사랑을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복거일, <사회적 선택과 개인들의 몫>, <<현실과 지향-한 자유주의자의 시각>>, 문학과지성사, 1990, 359쪽)아이를 몹시 때린 적이 있다. 당연히 '사랑의 이름으로'였다! 생각과 행동은 늘 따로 논다. (200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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