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어떤 사랑

귤밭1 2005. 11. 17. 19:49

기생과 그 기생집의 집사인 남자의 20년에 걸친 애타는 사랑이 있다. 이 두 인물의 사랑을 살펴보자. 

 

먼저, 환갑이 가까운 기생 오마담은 사랑의 화신이라 부를 만하다. 그녀는 여덟 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권번으로 들어왔다. "증조할머니도 과부였고, 할머니도 과부였고, 내 어머니도 과부여"서 "감히 팔자도망은 생각지도 못하고 하나 있는 딸마저 과부로 늙힐까봐 지레 겁을 먹"고(이현수, <<신기생뎐>>, 문학동네, 2005, 41-2쪽) 어머니가 자진해서 맡긴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셈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오마담은 "이 세상 과부들의 억눌린 살 내 생전에 모다 풀어주고,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애끓는 사랑일랑 싸그리 짊어지고 살"아가는(55쪽) 것이다. 이렇게 그녀는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성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기생의 운명을 산다. 그 하나가 사랑이다. 오마담은 보는 남자마다 정을 바친다고 할 정도로 헤프다. "밥 없이는 살아도 사랑 없인 못 사"는 오마담은 심지어 그녀의 재산을 털어먹은 남자조차도 원망하지 않는다.

"성, 나는 그 양반들 원망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소. 나는 그들 모두를 첫정처럼 똑같이 사랑했거든.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걸 바쳐서 사랑했기 때문에 난 원도 한도 없소."(36-7쪽)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기생으로서의 사랑이다. 그녀는 "남자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내세우는 기생의 사랑 방식은 이렇다.

"남자를 믿은 적이 없으니 그들이 날 버려도 배반을 해도 난 언제나 모든 걸 내줄 수가 있었다. 남자를 부정하고 나니 모든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너른 품이 생기더라. 이게 내 사랑의 방식이었느니. 느들 보기엔 내 사랑이 물 위에 뜬 거품처럼 부질없어 보였는지 몰라도."
"......"
"뜬금없이 들리겠다만, 철새들이 한 철 머물다 가는 철새도래지라고 있지 않냐? 사계절 먹이가 풍부하고 추운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서 철새들이 쉼터나 잠자리가 되어주는 을숙도나 주남저수지 같은 곳 말이다. 나는, 내 무릎이 남정네들에게 철새도래지 같은 그런 도래지가 되었으면 싶었구나."(68-9쪽)
그런데 아무리 기생이라도 해도 보통 사람으로서의 사랑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그게 부용각의 유일한 남자 직원 박기사에 대한 사랑이다. 박기사는 회사원으로 군산에 수금하러 왔다가 우연히 부용각의 능소화와 오마담에게 눈이 멀어 그대로 눌러앉아 그때부터 이십년 동안 오마담을 혹독하게 짝사랑해 왔다. 그가 오마담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침마다 꿀물을 타 오마담의 방 앞에 놓는 것이다. 그 끈질긴 사랑과 성의의 객관적 상관물이 마루에 찍힌 대접 자국이다.
지난 이십 년 동안 꿀물 대접은 같은 장소에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놓여졌다. 지금이라도 대접을 들면 대접 밑 동그란 테의 자국이 인두로 지진 것처럼 마루에 찍힌 것을 볼 수 있다. 여러 개의 테가 아니고 완전하게 둥근 것 하나. (중략) 둥근 대접의 테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이십 년 세월이 남긴 흔적이다. 마루를 뜯어내지 않는 한 누구도 그 자국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140쪽)
여기서 "인두를 지진 것처럼"이라는 비유는 단순히 자국이 뚜렷하게 찍힌 것만을 얘기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마담의, 손님과 맺는 사랑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자(박기사)의 욕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은 정성과 괴로움의 결과이다. 박기사가 타는 꿀물의 "꿀과 물의 황금 비율"의 비결인 "한 가지 일에 마음이 깊으면 언젠가는 마음이 통한다"(139쪽)는 말은 실상 그의 사랑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다음 인용에서 보이는 박기사 자신의 사랑에 대한 회고와 깨달음은 우리 소설사에서 사랑을 노래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좀 길지만 옮길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뒤채의 오마담에게 가는 그 길이 내게는 그렇게도 멀었다네. 아마 일평생 걸어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을지도 몰라.

 

붙잡을 수 없는 사람을 오래 마음에 두다보면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어. 그땐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네. 내가 본 것이 과연 본 게 맞는지. 가슴에 간직한 풍경이, 그 풍경 속에 실제로 내가 있었던 것인지 모든 게 의심쩍고 뒤죽박죽 엉망일 때가 있어. 그럴 적엔 그녀를 향한 내 사랑도 의심을 하게 되네. 과연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는 한 걸까.

 

오마담이 정사를 벌인 마루 위의 그 자리. 꽃살무늬 방문 앞에 날마다 꿀물 대접을 가져다두는 것도, 마루에 인두로 지진 것처럼 동그랗게 난 대접 밑 테의 자국도 돌아보면 증오인 것을.

 

식물들에게 물을 줄 때에야 난 겨우 나의 본색을 되찾네. 물을 줄 때마다 나는 느끼네. 식물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할 위엄이 있다고. 거목은 한 알의 씨앗이 숲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살아왔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을 말없이 견뎌왔겠나. 그에 비하면 내 사랑은 하찮다는 생각이 드네. 발부리에 걸리는 돌이나 잡풀처럼. 그러나 진정 불쌍한 것은 그 하찮은 것들이 아니겠나.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끓는 마음이 아니겠나. 그 마음을 들킬까봐 안절부절못하는 또 다른 마음이 아니겠나.

 

나무는 늙을수록 값이 나가고 땅 속 도라지는 묵을수록 금이 오르는데, 저마다 늙은 것들은 다 쓸모가 있는데 남자 늙은 것만은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다는 타박네의 말이 생각나네. (중략) 나도 노후가 걱정되네만 후회는 안 해. 능소화와 대숲 사이에서 보낸 한 생을 결코 후회 않네. 거기에 하늘도 들이고 바람도 들이고 심심찮게 푹풍우도 불러들였으니 그만하면 한세상 잘 품다 가는 것 아니겠나.(163-4쪽)

정의 사람이랄 수 있는 오마담이 박기사의 이 절절한 사랑을 모를 리는 없다. 잃어버린 고음을 찾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회음혈에 사향뜸을 뜨면서 기절 직전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박기사를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른다. 기생으로서 살았기 때문에 보통의 여자로서 그를 떳떳이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박기사의 꿀물 대접에 대한 오마담의 마음속 소리도 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

지난 이십 년 동안 꿀물 대접을 들고 내게 오는 당신의 발소리를 들었소. (중략) 한 발을 뗄 적마다 이리저리 흩어질 당신의 어지러운 마음과 한 발을 디딜 적에 오롯이 맺힐 아픈 마음도 환히 알고 있었소. 그럼에도 나는 자는 척 누워 있었소. (중략) 내가 당신을 모른 체한 것, 끝내 당신이 내게로 오지 못한 것, 당신은 그것 때문에 평생을 아팠겠지만 그 또한 사랑의 형태요. 내 사랑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해주오.(233-4쪽)
이렇게 오마담은 박기사의 사랑을 모른 체하면서 기생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기생으로서 소리에 대한 집념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소리를 한 치만 뛰어넘을 수 있었으면"(206쪽) 하는 마음으로 선생을 찾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목은 이미 갈라졌고" "높은 음을 내지 못한다."(67) 그래서 앞에서 소개했듯이 "살이 타는 고통"(234쪽)을 감내하면서 회음혈을 뜬다. 오직 한 가지, 잃어버린 고음을 찾기 위해서다.

"잃어버린 고음을 찾을 수만 있다면. 소리의 마지막 고지, 절대적인 소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오마담은 팔한지옥 천길 벼랑도 겁날 게 없다."(235쪽)
이 정도면 오마담의 기생 이력을 성의와 무상의 사랑이라고 해도 그리 과장이라고는 못할 것이다.

 

둘의 이 지극한 사랑은 왜 현실로 나타나지 못했을까? 육체와 결합된 사랑은 유한하기 때문일까? 몸은 죽고 썩으므로 영원일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기생의 길을 간 오마담은 그렇다고 해도 박기사의 금욕적인 사랑은 아무래도 안타깝다. 후회하지 않는다지만 나로서는 믿기지가 않는다. 내 영혼이 비루한 탓이리라.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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