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은 내가 주목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종종 드러나는 그의 감상주의라고 할 만한 부분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진지함 때문인 것 같다. 그를 볼 때마다 예술가에게도 운명의 얼굴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그의 한 구절을 보기로 하자.
"동네에 아이들이 몇이 생겼다. 지들끼리 못 살게 생깄더라도 아그들은 누가던지 키워야재 어째 자식덜만 여그로 내리보내는지 말세다. 저그 살기가 얼매나 힘들먼 자식을 늙은이들한티 매끼놓았겠느냐만 여그도 말이 아닌디.... 이 마을서는 나도 젊은 축인디..... 아그들이 지 부모랑 헤어지서 이 시골딱지 생활이 적응이 되겄냐.... 소성 아짐네 손녀는 지난봄에 지 아배 어메가 여그다 맡겨놓고 갔는디.... 맹랑한 것이다.... 인자 육학년인 것이 유서까장 써놓고는 학교 옥상서 뛰어내리가고는.....(신경숙, <달의 물>, 전상국 외, <<2002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현대문학, 2002, 92쪽)시골에 사는 아버지가 일인칭 작중화자인 딸에게 보고하는 농촌 사정이다. 거기에는 이제 늙은이들만 사는데 묘하게도 도시로 떠난 젊은이들의 아이들이 다시 내려온다. 물론 도시에서 아이와 함께 살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도시와 농촌 모두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황폐한 곳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농촌이 자연성을 잃어 버리게 됨에 따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가는 사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이다.
이제 시골에서 자연의 물을 보기가 어렵게 됐다는 점을 이 작품은 곳곳에서 강조한다. "저 바다를 가로막아놓은"(117쪽) 새만금간척지구, 이제는 복개되어 시멘트 바닥이 되어 버린 마을의 또랑물(131쪽)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 아버지가 새로 집을 지으면서 없애 버린 우물물도 이제는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새집을 지으면서 읍내 사람들처럼 수돗물을 집으로 들이고 쓸모가 없어진 우물은 시멘트로 덮은 거였다. 그로 인해 아무때나 들여다보면 맑은 물이 눈에 출렁거렸던 우물은 마당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물이 시멘트 밑에 갇혀 있단 말인가, 싶으니 기이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는 집에서 물을 떠 마시거나 달이 뜨는 밤이면 노란 달을 품고 있던 한없이 들여다보는 건 틀린 일이었다. 사라진 흙마당이나 감나무나 우물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후로 이 집이 내 집 같지나 않고 서먹하였다. 간혹 여길 오면 방문객이 된 기분까지 들었다.(90쪽)이 소설의 제목 '달의 물'은 이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제는 시골의 길가에도 어김없이 늘어선 모텔과 그것을 차갑게 비치는 '차가운' 초승달은 그러므로 비감에 젖도록 만든다.
밤하늘엔 새초롬한 초승달이 차갑게 떠 있었다. 차창 바깥은 어둡고 바람까지 쌩쌩 부는지 길가의 나무들이 부산스러게 흔들렸다. 이따금 휘황한 불빛이 보여 간판을 읽어보면 무슨무슨 모텔이었다. 마을의 집들은 무너지는데 길가에는 새초롬한 모텔 건물들이 들어서는 중인가 보았다.(99쪽)그러므로 이 작품은 달과 물, 그리고 인간이 어우러진 세계를 상기함으로써 시멘트로 덮어 버린 오늘날의 삭막한 인공 세계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판이라기보다는 '오래 된 미래'에 보내는 비가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조화된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내소사이다. 그 절 입구에 들어가 보자.
아름드리 전나무들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푸르기가 이를 데 없었다. (중략) 고갤 돌려보면 전나무 사이로 야트막한 계곡이 엿보이기도 했다. 잘잘잘 차가운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지에 연둣잎이 돋고 저 물소리 또한 따뜻하게 들리는 봄쯤에 전나무로 에워싸인 이 길을 걸으면 아마 정형외과 의사도 용서하게 되지 않을까.(109쪽)참고로, 정형외과 의사는 작중화자가 근무하는 약국의 영업을 영악스럽게 방해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인간형이다. 말하는 김에, 친구에 대한 지극한 배려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게 되고, 그 아들을 시골의 아버지에게 맡겨야 될 처지에 있는 '내' 오빠와 대립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해 두기로 한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쁜 사람도 용서하게 만드는 힘을 자연은 갖고 있는 것이다. 내소사에서는 자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것도 사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 주면서 보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이끈다. 대웅전의 꽃살무늬가 그렇다. "꽃살무늬를 새겼을 사람의 정성스러운 그 손길의 간절함이 전해지는 듯하여 숙연해질 지경인 것이다."(112쪽)
몇 해 전인가 젓갈 사러 왔다가 여길 처음 와봤니라.... 이 꽃살무늬가 얼매나 좋고 이쁘던지 마음까지 포근해지는 것이.... 맴속에 뭔 불덩이 같은 것이 치받치머는 나 혼자 버스를 타고 와서 전나무 길을 걷고 히여 여그 와서 이것을 보고 갔지 않었냐. 수십 번은 되얏을 것이다.(112쪽)이렇게 자연과 사람의 정성은 한편을 이룬다. 자연은 이런 것이다. 사람을 현재 이상의 어떤 존재로 만들어 주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화를 스스로 삭이게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당장의, 길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익에 눈이 멀어서 자연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행해지는 쪽으로 가려고 한다. 어머니의 한탄을 들어 보자.
다리는 자꼬 뭐 할라고 놓아쌓는지 모리겄어야. 여그 사람들은 하나도 불편허도 안 헌디. 너그 아버지도 오토바이 좀 안 타고 댕기면 쓰겄다잉. 차가 안 댕길 적엔 읍내도 빨리 가고 좋더마는 요새는 뭔 차가 그르케 많이 생깄는지. 이 동네 사람들은 늙은이뿐잉 게로 누가 차 몰고 댕기냐.(141쪽)
당장의 편리를 위하여 우리는 오랜 걸려 정성스럽게 만들어낸,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세계를 함부로 없애는 것이 아닌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멀리하고서 진정한 행복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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