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순창에는 비가 옵니다. 걷기에는 불편한 그런 정도라면 통할지 모르겠네요. 오후에는 갠다니까 그때 걷기로 하고 피시방에 와 있습니다. 어제, 오늘 많이 걸어서 좀 쉬라고 내리는 거라고 내 멋대로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원까지는 24Km 정도 되니까 늦게 시작해도 충분하거든요.
이곳에는 아침인데도 젊은이들이 꽤 있네요. 주로 게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쩐지 이 아이들이 불쌍해집니다. 할 일이 저렇게 없을까요? 저게 일이라고 하면 뭐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그런데 저들도 아침부터 여기 있는 나를 측은하게 여길지 모르겠네요.
걸을 땐 전혀 못 느낀 건데 낯선 곳에 와서 아침부터 이러고 있으니 집이 그립고 딸도 보고 싶고 그렇네요. 절실함을 담아 행복하게 지내시라는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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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 잘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거리가 27Km 정도라 10시 정도에 출발했는데 4시 조금 지나서 남원에 올 수 있었습니다.
예보대로 10시가 되니 비가 그쳤습니다. 날씨 예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오늘은 거리가 짧을 뿐 아니라 걷기에도 알맞은 날씨라 한결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저께와 어제는 아직 버들강아지의 꽃망울에도 서리가 맺혀 있을 정도여서 아직 봄이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날씨만은 봄기운이 완연해서 걷기에는 좀 더운 느낌이었습니다. 땀을 많이 흘렸으니까요. 거리를 줄이느라 빨리 걸어서 더 그랬겠지만 걷는 데 딱 맞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2006. 2. 22)은 날씨가 흐려서 햇빛도 나지 않고 또 적당히 춥기도 해서 걷기에는 그만이었습니다. 오늘 점심은 라면을 먹었습니다. 컵라면 같은 것은 아주 질색이지만 라면은 가끔씩 먹는데 어제, 오늘 참 라면이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있는 허름한 가게에 들어가서 주인 할머니에게 라면을 끓여 달라고 했지요. 달걀도 하나 놓고요. 역시 시골 인심이라 밥도 주느냐고 묻길래 그러마고 해서 아주 맛있게 요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얼마 받았는지 아세요? 라면을 사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도보 여행하면서 식단을 눈여겨 본 적은 있어서 3천원쯤 예상했는데 2천원이라고 했습니다. 밥도 얻어먹고 했으니 3천원을 받으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도 다 그렇게 받는다면서 거절했습니다.
오늘은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에 왔는데 어제의 길에 비해서 차가 많기는 하지만 걷는 데 크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오르막 길도 없고 강도 지나지 않아서 재미는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남원을 8Km 정도 남기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랑비지만 옷과 배낭이 젖으면 귀찮을 것 같아서 버스를 탈 생각으로 정류장에서 기다리는데 차가 얼른 오지 않았습니다. 가만 있으려니 춥기도 하고, 오늘은 얼마 걷지도 못했는데 목적지를 조금 남기고 차를 타는 것이 싫어서 비 맞으면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걷기 시작하자마자 곧 비가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은 늘 내 편인 것만 같습니다. 우연도 성의를 편든다는데 내게는 그것도 없는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일찍 왔으니 목욕이나 하자고 해서 목욕탕에 갔더니 정기 휴일이네요. 여행자는 좀 땀 냄새도 나고 해야 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하기는 옷도 더럽고 해야 여행자답게 아무 데나 앉고, 그에 따라서 마음도 자유로워지는 법이거든요. 가리는 게 많으면 몸과 마음이 불편해질 뿐더러 세상과 잘 섞일 수가 없거든요.
내일은 곡성으로 갑니다. 하루 걸음으로는 거리가 짧을 것 같아서 내려가는 중간에 진로를 바꿔서 순창 쪽에서 곡성으로 흐르는 섬진강 줄기를 따라 올라가다 시간에 맞춰서 강의 맞은편 길로 내려와서 다시 원래의 길(17번 국도)로 들어서려고 합니다. 지도로 보기에는 강폭이 넓지 않아서 보면서 걸으면 아기자기할 것 같았습니다.
돌아볼수록 섬진강 줄기가 다양해서 다 돌아다니려면 여러 번 이곳으로 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얕은 소견으로는 이 강의 발원지를 얘기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나다니다 보면 이름 모를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여 섬진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발원지는 아주 여러 군데가 되는 셈이지요.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는 거지요. 강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기원을 따지는 것은 대체로, 사실이 그렇기보다는 사람들이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는 것이 맞다면 단군은 누구에게서 나왔을까요? 하느님이나 신이 궁극적인 기원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다고 정색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만.....
<사진 몇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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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 아무 이상 없이 잘 왔습니다.
예보에는 구름이 낀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화창한 봄날씨였습니다. 광한루를 지나는 냇가의 둑길에서부터 오늘의 걷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일부러 산책길을 만들고 벚나무도 심어 놓아서 특히 봄에는 아주 멋진 길이 될 것 같았습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쉽지만 지도에 나온 대로 강둑길을 버리고 큰 길인 17번 국도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잠깐 걸었던 강둑길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 건너 강둑길에서 무언가를 놔 두고 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에는 길이 표시되지 않았으니 어디서 끊길지 모릅니다. 그래서 망설였습니다.
모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일었습니다. 곡성까지는 길어 봐야 16Km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길이 없어지면 되돌아나와도 목적지까지 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지요. 눈치가 없는 대가로 다리가 좀 고생하기는 하겠지만......
그래서 다시 강둑길로 올라섰습니다. 모험은 할 만할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흙길인 거 있지요. 거기다가 차도 없었습니다. 임실, 순창에서 내려오는 섬진강 줄기와 만나는 곳까지 이어지는 둑길에서, 시간으로는 네 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만난 차는 세 보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열 대가 못 된 것은 분명합니다. 정말 행복한 길이었습니다. 이러려고 그랬던 것인지 아침에 김밥집에서 산 김밥까지 먹었으니 봄소풍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섬진강과 만나는 곳이 이르니 문득 둑길은 없어지고 찻길이 나타나고 맙니다. 어제 얘기한 대로 바로 곡성으로 가지 않고 730번 도로를 따라 섬진강으로 한 시간 반 정도 올라갔습니다. 역시 큰 강이라 얕은 곳을 흐를 때는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웅장하고 색깔도 한층 짙푸릅니다. 여기에 오면 생각이 바뀌어 역시 강에는 둑이 없어야 되는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둑은 인간을 위해서 자연스러움을 없애 버리고 마니까요.
왜 강물에 홀딱 반하게 되는 걸까요? 아마 강물이 걸음의 자연성과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자연스러움이라면 흙도 빠질 수 없겠지만 이제 흙은 겨우 볼 수 있게 되어 버렸습니다. 길은 포장이 되었고 농사 짓는 밭은 비료와 농약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으니까요. 물도 오염이 되고 말았으니-그래서 생수를 사먹는 거잖아요- 흙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섬진강 같은 곳은 아직 자연성이 살아남아 있지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행복하게 놀았던 양수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도 이 매혹에 깊숙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겠지요.
내일(2006. 2. 24)은 구례로 갑니다. 강 따라 걷는 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내일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요.
<사진 몇 장>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사진 8, 사진 8, 사진 9,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 사진 13, 사진 14, 사진 15, 사진 16, 사진 17, 사진 18, 사진 19, 사진 20, 사진 21, 사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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