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빛나는 5월에 교육을 생각하며

귤밭1 2006. 5. 4. 08:18

5월은 어느 때보다도 교육과 관계가 깊은 달인 것 같다. 이 달에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있을 뿐만 아니라 봄의 절정에 이르러 신록으로 아름답게 치장한 자연이 저절로 변화와 성숙을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변화와 성숙이야말로 교육의 핵심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생각에 교육은 원석을 갈고 닦아서 보석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어려운 일이다. 좋은 보석을 만들자면 전문적인 기술은 물론이고 원석의 성질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뤄 가는 수양이라든지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지 주체의 마음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대상에 쏟는 관심이 깊어지면 그 대상은 어느새 제 나름의 단단한 고집을 지닌 주체로 탈바꿈해 버린다. 그러니까 단순히 원석만 다듬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깎아 내는 아픔도 겪어야 한다. 어떤 이가 말했듯이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도 바뀌어야 교육이 제대로 이뤄진다. 이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 모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바뀌는 것이 교육의 이상을 이룬다. 교육에서 얻는 보람이 어느 일에서보다도 크다면 그것은 바로 선생과 학생이 그 과정에서 함께 변하는 데서 오는 것일 것이다. 이런 말을 하다 보니 보석에다 조각을 새기는 일에서 느끼는 기쁨과 뿌듯함이 고통과 반성의 결과라는 점을 얘기하는 자전적인 소설의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광을 내는 작업이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제 삶을 문지르는 작업이라면 조각도 마찬가지다. 꽃을 피워내는 기쁨, 잎을 틔워 올리는 뿌듯함은 제 살을 파내는 고통스런 의식을 거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각은 바로 자기 생살을 파내는 작업이다. 삶이라는 수평 바이스에 물려 몸 받은 자로써 고통을 감내하는 의식은, 우선 자기 뼈와 자기 피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꽃도 피울 수 없고 어떤 이파리 하나 매달 수 없다는 치열한 자기 반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쌀 알 하나에도 수백 자의 글씨를 새겨 넣는 사람들의 집중된 땀구멍을 들여다보라.(유용주, <<마린을 찾아서>>, 한겨레신문사, 2001, 112-3쪽)

그렇다. 죽은 것을 가지고 하는 일도 이럴진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말해서 무엇하랴! 거기에 쏟아야 하는 성의를 생각하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정말이지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능력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요즘에야 젖먹이 때부터 여기저기서 교육을 받아 아이들이 유식(?)하지만, 우리 때만 해도 글을 쓰기는커녕 읽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학교에 들어갔다. 잠시 개인적인 추억을 얘기하면,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배운 숫자를 집에 돌아와서 쓰는데 2와 8자를 제 모양대로 베끼지 못해 낑낑대는 나를 지켜보던 어머니가 한숨을 크게 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런 아이가 선생님에게 배워 이만큼이나 어른으로 자랐던 것이다. 선생님은 마술사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새 이파리가 나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달리 보면 세상의 모든 기운이 참여하는 무척 신비로운 현상이듯이 사람이 크는 과정에도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육이다. 그러므로 교사, 특히 어린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축복 받아 마땅하다. 우리 모두가 학생이거나 한때는 학생이었으므로 교육에 바친 선생님의 남다른 정성을 생각하며 편지라도 써 볼 일이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