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없으면 살 수 없을 밥과 김치가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 거쳐야 할 과정을 생각하면 숙연해지는 바가 있다. 이제는 우리 생활이 농사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져 버려서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없을 테지만 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할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완제품을 사먹을 수 있게 되어 무척 편리해진 대가로 우리는 기다림과 생명의 엄중함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도 나옴직하다. 그런데 우리는 밥상에 이 음식들이 오르자면 오랫동안 자연이 합심하여 서로를 키우고 여기에 농부의 자상한 손길이 더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다른 상품과 등가로 교환되는 농산물들이 상품 가치 이전에 그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에 관여한다는 것을 자꾸 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인 인간은 자기 이외의 다른 자연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자연을 다만 재료로서, 또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의 내면적 삶을 가르쳐 주는 존재로서 다른 자연을 보아 나가야 합니다. 이렇듯 자연이 교사의 지위를 차지해야 하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목적도 이와 관련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물론 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거나 도시 주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의 내면을 진실로 차분히 정착시키는 것, 기다림의 의미를 인생에서 되살리는 것을 그 목적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참는다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봅시다. 나는 결코 봉건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린다든가 참는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자연은 교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측면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이마미치 도모노부, 정명환 역, <<에코에티카―기술사회의 새로운 윤리학>>, 솔, 1993, 170-1쪽)
현대의 기술은 존재의 특성과 다양한 측면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편리성과 이윤이라는 측면만 강조한다. 에너지와 원자재의 원천이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 앞에서 모든 존재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갖다 쓸 수 있고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부품이 된다. 강물은 저 스스로 흘러가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원이며, 울창한 숲은 지구라는 전체 생태계에 공기를 공급하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신문을 만드는 종이의 재료일 뿐이다. 이렇게 자연을 착취하는 우리들 역시 역설적이게도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근대의 산업은 더 빠른 속도와 더 많은 양을 목표로 내걸어 생물에게 산업 시간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시공간을 단축시키려고 애써 왔다. 예를 들어, 양계장의 닭들은 좁디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쳐야 하며, 그들의 하루는 열두 시간으로 단축된다. 속성 재배, 화학 비료, 농약, 호르몬제, 유전자 조작, 유전자 복제 기술 들은 동식물에게 필요한 시공간을 줄여 산업의 가속화된 시간에 무리하게 짜맞추려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들은 혼란을 겪고, 불안정해지고, 열성화(劣性化)되며, 폭력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면서 농부들은 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절로 나서 자라는 것을 돌본다. 기술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자연의 속성을 완전히 변화시키거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는 일에 점점 서툴러지고 있다. 요컨대 함께 모여 사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기다림을 뺀 사랑을 생각할 수 있는가!
기다림과 견딤과 느림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온갖 힘이 합하여 자란 배추와 쌀이 어떻게 하여 우리의 몸에 이르는지를 생각하면 자연의 신비스러움 앞에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을 우리의 스승으로 모신다면 우리는 행복해지고 서로를 귀하게 보살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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