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라디오 스타>>-패배자에 대한 비가 혹은 목가?

귤밭1 2006. 10. 24. 14:23

<<라디오 스타>>에서 누구의 눈에도 얼른 들어오는 것은 서울과 지방(영월)의 대립이다. 서울은 잘나가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연예 기획사 사장 같은 이가 이런 서울 사람을 대표한다. 여기서는 합리적인 계산에 따라서 냉혹하게 움직인다. 정이나 의리 같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성공하는 데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이다. 돈이 되어야 계약을 하고 그럴 가능성이 없으면 경쟁에서 밀려나고 만다. 서울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가야 한다.

80년대에 가수왕 상을 타기도 해 제법 이름을 날렸던 최곤(박중훈)과 그의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이런 서울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의 사업 방식은 전근대적인 주먹구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기를 끌어올릴 계획도 그것을 실행할 능력도 없다. 그저 수공업적으로 매니저가 전단을 붙이고 다니고 다방에 들어가 최곤이 진행하는 방송을 들어 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낙오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80년대라는 시대적 의미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 같다. 한마디로 저 연대는 이념의 시대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 관념성과 조급성이 얼른 눈에 들어와 낯 뜨거운 바가 없지 않지만 어쨌든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이상이 또렷하게 빛을 밝히고 혁명에 대한 열정이 흘러 넘쳤다. 그래서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그런데 90년대가 되자 세상은 아주 달라져 버렸다. 이념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롱당하는 지경으로 내몰리고 그 대신에 개인의 욕망이 전면에 대두되었다. 너도나도 난숙한 자본주의 꽃을 스스럼없이 즐기게 되었다. 대중 가요의 양상도 이와 비슷하게 바뀌지 않았을까? 가수의 가창력은 부차적이고 춤 솜씨라든가 기획사의 용의주도한 훈련과 이미지 광고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무대에서도 음반을 틀어놓고 가수는 입을 움직이는 흉내만 내도 되게 되었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생리를 얼마나 잘 체득하고 발휘하느냐가 성공과 실패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서울과 대조되는 지방으로서의 영월은 한마디로 초라하다. 크게 내세울 것이 없거나 삶에 패배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밀리고 밀리던 끝에, 폐쇄되기 직전에 있는 방송사 지국의 디제이를 맡게 된 최곤을 비롯하여 그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못난이들이다. 원주 방송국에서 좌천당한 강 피디, 가출하여 다방에서 차를 나르는 미쓰 김, 이 다방에서 얼마 되지 않은 돈을 외상하고 갚지 않는 세탁소 주인, 가출한 아버지, 화투를 치면서 다투는 할머니들, 최곤을 따르는 밴드(이스트 리버), 중국집 배달부 들이 그들인데 죄다 들자면 끝이 없다.

당연하게도 이 영화는 실패한 군상에 대한 비가(悲歌)만은 아니다. 지방 사람들의 애환을 따뜻하게 살피고 감싸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방송에 나오는 꾸밈없는 삶의 진실―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우러르는 세련이나 교양이 가식일 수 있다는 점을 문득 깨달았다―을 만나 같이 울고 웃으며 누리는 즐거움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염된다. 그래서 나는 꽤 많이 울었다.

인간의 이상을 상기시키는 것은 눈물을 부른다. 슬픔의 눈물은 이상을 결여한 현실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다. 감동의 눈물은 이상이 현실화됐다거나 그에 가까이 갔다고 느끼는 데서 저절로 나온다. 지방은 초라한 패배자들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서울에 없는 정이 있는데 이게 이상의 일부를 이룬다. 정은 비합리적인 것이어서 돈으로 계산이 되지 않는 가치다. 기획사에 소속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서울로 돌아가는 박민수에게 최곤이 화가 나서 건네는, '배신하는 거냐'는 말이야말로 정으로 맺어진 인간 관계의 핵심을 드러내 준다. 이들에게는 계약서에 기초한 합리적인 관계가 아예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감동의 눈물은 영월의 동강, 이 이름을 딴 이스트 리버 밴드, 미쓰 김이 방송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가출했다는 얘기를 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박민수가 다시 최곤을 찾아왔을 때 내리는 비와 바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준다. 그 동안 자기 자신을 미워해 왔다는 미쓰 김의 눈물 어린 고백은 이 정화의 뚜렷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관객이 등장인물과 함께 흘린 눈물은 잃어 가는 것에 대한 반성과 그리움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물은 시원적인 것을 뜻한다. 우리는 다 어머니 뱃속의 양수에서 자랐다.

그런데 나는 눈물을 많이 흘렸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눈물이 헤픈 것 같아 못마땅하기도 하다. 지방이 지나치게 목가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가 '오래된 미래'로서 작용하는 것은 좋지만 현실의 지방이 어디까지나 서울에 종속됐다는 사실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지방이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원리가 비켜 가지는 않는다. 가출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서울로 가야 할 것이다. 최곤의 방송도 인기를 끌면 서울 본사의 입김으로 전국에 방송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방송을 매개로 중국집 배달부가 미쓰 김과, 꽃집 청년이 농협 여직원과 연애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설정한 것은 지나쳤다. 현실에서도 이런 행복한 결과가 나올까?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내가 너무 냉정한 도회지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일까?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김밥집을 하다가 망하여 지하철역에서 김밥을 파는 처지로 떨어져 버린, 박민수의 아내가 남편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가족을 버리고 최곤에게 돌아가는 박민수는 어떤 남편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고 있다. 과거의 열렬한 팬-박민수의 아내는 최곤 팬클럽 회장이었다-도 어려운 환경에서는 생활인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러한 리얼리즘의 결여가 <<라디오 스타>>의 예술적 성취에 큰 흠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쉽게 목가를 허용하지 않는다.

 

 

(덧붙임)

 

박민수가 동강에 빠져 죽자고 했을 때 곤은 같이 죽으면 동성애 하는 줄 안다고 거절하는데 뒤집으면 둘은 동성애나 마찬가지의 관게에 있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곤은 이준익의 출세작 <<왕의 남자>>의 연산군인 셈이다. 그렇게 보면 박민수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곤이 오로지 민수만을 기다린 것도 이해가 간다. 외로움을 다른 여성을 통해 달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박민수도 딸에게는 아빠의 태도를 보이지만 아내에게는 남성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영화의 맥락으로 보면 남성으로서 나타날 필요는 없지만-도 고려 사항이 되겠다.

그렇다면 가족의 해체를 통해서 공동체로 가는 길을 얘기하려고 했던 걸까? 앞의 글에서 논의한 것을 고려하면 그렇게 못 읽을 것은 없겠다. 감독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2006.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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