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지나친 의인화는 감상주의다

귤밭1 2006. 12. 14. 07:42

감상주의라는 말이 있다. 적절한 정도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이 정도를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젠데 여기서는 간단하게, 지나치게 반응함으로써 대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폐해를 드러내는 것을 그 기준으로 제시해 두기로 하자. 한마디로 감상주의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파악하는 데서 나온다. 그 양상은 다음과 같다.

감상주의는 애상감, 비감 등의 정서를 인간성의 사실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그런 정서에 빠져 있는 상태를 즐기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장할 때 생긴다. 애상감, 비감 등은 인간의 정서인 이상 물론 문학에서 표현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상황이 마련되어야 하고, 적절한 말씨가 선택되어야 한다. 문학이 어떤 정서를 일으킬 때 독자는 일종의 쾌감을 느끼지만, 그 쾌감을 일으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여 작품의 사실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그 정서를 조장하고 연장시키려고 하면 우리는 얼마 안 가서 그 허위성을 감지한다. (중략)

 

감상주의는 한편 비감, 애상 등 눈물과만 관계가 있지 않고 소박한 낙관주의와도 관계가 있다. 인간과 사회현실을 도외시하고 값싼 이상주의나 낙관주의에 탐닉하는 것 역시 감상주의이다. 어린이, 농민, 동물에 대한 무비판적인 예찬, 영웅에 대한 숭배, 자연물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태도(돌, 나무, 꽃을 불필요하게 의인화하는 경우―'감상적 허위') 등도 역시 감상주의가 될 수 있다. 원시주의, 전원주의, 영웅주의, 범신론 등이 감상주의의 적인 사실주의에 의하여 심각히 도전받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현대의 신문, 잡지 등의 특종 기사는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눈물을 머금고', '푸른 하늘도 앞날을 축복하는 듯하였다' 등등의 우리의 사실적 감정과는 동떨어진 감상적인 말투를 곧잘 사용한다. 이것은 감상주의가 대중성과 관계있음을 입증한다.(이상섭, <감상주의>, <<문학비평용어사전>>, 민음사, 1976, 12-3쪽)

왜 이렇게 '문학 개론'을 강의하듯이 하느냐 하면 어떤 책의 서문에서 계속 읽어나가기가 거북할 정도의 감상주의와 만났기 때문이다. 내용이 좋다고 그 지은이(황대권)의 글(여기를 보세요)을 이 집에 옮기기도 했던 터라 속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의 기나긴 투옥 이력 자체로만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뿐더러, 그의 출세작인 <<야생초 편지>>에서 너무 흔해서 오히려 눈이 가지 않는 잡초에 주목함으로써 세상의 다양성과 생명의 존엄성을 설득력있게 얘기했던 바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내 혼자만의 주관적인 평가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의 글을 직접 옮기는 것이 좋겠다.

장미꽃을 심어놓고 숙이 아버지는 매일 아침 정성스레 물을 주었습니다. 장미는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자 장미는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화사하기 그지없는 꽃이었습니다. 장미는 잔디밭에 자기밖에 없는 양 으스대었습니다. 마치 '누구 나보다 예쁜놈이 있으면 나와봐' 하는 듯하였습니다.

 

장미꽃 아래에는 그새 많은 야생초들이 꽃을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민들레, 냉이, 지칭개, 꽃마리, 애기똥풀, 고들빼기...... 이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작고 예쁜 꽃을 피워냈지만 누구도 상대방을 깔보거나 으스대지 않았습니다. 장미는 발아래 민들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는 어째 그렇게 키가 작고 못생겼니?' 민들레는 힐끗 위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른 야생초들과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민들레는 결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민들레뿐 아니라 다른 어떤 야생초들도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민들레가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야생초가 만발한 들판이 아름다운 이유도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온갖 꽃과 풀이 서로 어울려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도 야생초 화단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타고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남을 사랑해야 합니다. 민들레는 결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황대권, <작가의 말>,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열림원, 2006)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안다. 마치 식물을 으스대고 부러워하는 사람인 양 그려 놓고 있다. 장미 옆에서는 다른 풀들이 잘 자라지 못한다는 점-물론, 사실과 부합하는지 모르는 채로 그냥 예로 들어 봤을 뿐이다-을 얘기하지도 않은 채,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근거 하나 드는 일 없이 장미를 저렇게 다루는 것은 아주 적절하지 못하다. 민들레가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말도 따져 볼수록 무슨 뜻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지나친 의인화와 함께 두 대상을 다루는 방식도 문제다. 민들레를 포함한 야생초들과 장미를 다른 편으로 나눠 억지로 대립시켜 놓은 다음에 한쪽의 긍정적인 측면만 강조하려다 보니 다른 하나는 부당하게 낮추게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편파적이다. 강조점은 혹시 부각될지 모르나 잃은 것이 너무 크다. 좋은 글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대상의 복잡한 전체성(이것에 대해서는 여기를 보세요)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는 그의 생태론을 의심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겉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야생초 화단에서도 풀들이 한편으로는 상생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잘 살기 위해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해야 사실에 더 들어맞는 게 아닐까? 약한 것이 도태된다는 것은 슬프기는 하지만 어김없는 자연 법칙이다. 이런 전체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미래를 기획해야 감상주의적인 낙관에서 벗어나 현실성을 지닐 수 있다. 지은이의 감상주의가 제발 이 글에만 한정된 것이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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