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한비야가 고3에게 하는 말

귤밭1 2006. 12. 22. 11:23

멋진 한비야가 그럴듯한 얘기를 하네요. 수능을 마친 고등학교 3학년이 그 대상이지만 우리 집 식구들이 다 들었으면 좋을 내용이어서 여기에 옮깁니다. 마침 연말이고 하니 이 글을 계기로 지난 일년, 더 넓혀서 우리 삶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꽃 피는 때는 다 따로 있다


요즘 수능 본 학생들에게 하는 말 “영 아닌 과로만 가지 마라”…목표가 뚜렷하지 않다고 걱정 말기를, 첫걸음 방향만 잘 떼기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요즘 신문 칼럼이나 잘 팔리는 책마다 예외 없이 하는 말이다. 특히 수능 뒤 본격적으로 학교와 학과를 선택해야 하는 학생들과 막 취업전선에 뛰어든 젊은이들에게 주는 말일 거다. 나 역시 책과 강의 등을 통해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주문을 하곤 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를 말이다. 수능을 마친 고3 학생들만 해도 그렇다. 학창시절 내내 학교라는 가마솥에 넣어놓고는 ‘공부해라, 공부만 해라, 공부만 잘해라’라며 푹푹 삶아대던 어른들이 갑자기 얼굴색을 달리하며 무엇을 할 때 네 가슴이 뛰더냐고 묻고 있으니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낙타가 숲에서 산다면

그래서 학생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저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한국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다. 세상에 몇%의 10대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명명백백 깨닫고 있을까? 물론 하늘이 낸 예술가나 천재들은 10살도 되기 전에 이미 제 갈 길을 알겠지만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안개 속의 물체처럼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수능을 본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있다.
“적어도 네가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과에는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낙타로 태어났으면 사막에, 호랑이로 태어났다면 숲 속에 있어야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쓰면서 살 수 있는 거다. 만약 낙타가 숲에서 산다면 잘 걷지도, 나무에 오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낙타 최대의 장점인 물저장용 혹도 방해물이 될 뿐이다. 물론 우리가 맞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마치 숲 속에 있는 낙타라도 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삶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자기가 가진 기질을 최대한 활용하며 나도 즐겁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기는커녕, 평생 왜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걸까라며 열등의식과 불만에 가득 찬 날을 보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만약 나의 최종 목적지가 부산이라면, 출발지를 떠날 때 부산행 기차를 타면이야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적어도 마산이나 진주로 내려가는 남행열차를 타야지 평양이나 신의주 가는 북행열차를 타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실은 나도 가고 싶었던 학과에 가지 못했다. 나에게 특별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에는 언론학이나 국제관계학과가 없었다. 영문과는 차선책이었다. 미국 유학 때도 그랬다. 개인장학금을 받아 가는 학교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매우 적었다. 그때 나는 원하는 그 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세계를 무대로, 대중을 상대로 일할 수 있는 과라면 일단 가자,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제홍보학과였다.

 

놀랍게도 차선책이었던 국제홍보학이 내게 가슴 뛰는 일을 만나게 해주었다. 세계일주 중, 아프리카 오지여행을 하면서 같이 놀던 아이가 설사 같은 시시한 병에 걸려 죽는 걸 보았다. 알고 보니 800원짜리 링거 한 병이면 살 수 있었다. 내 전공을 살려 이런 참상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린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생각했었다. 그 뒤 나는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이 되었고 대형 재난 현장에서는 홍보 담당으로 일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도 지금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그 방향으로 첫걸음을 떼었느냐가 중요하다. 완벽한 지도가 있어야 길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울부터 부산까지 가는 방법은 수십 가지다. 비행기나 KTX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국도로 가는 승용차처럼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 질러가든 돌아가든 여러분의 인생 표지판에 신의주가 아니라 부산이라는 최종 목적지가 늘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거다. 방금 본 이정표에 대전이라고 써 있어도 괜찮다. 목포라고 써 있어도 놀라지 마시길. 여러분은 잘 가고 있는 거다. 적어도 남행선상에 있는 거니까.

 

늦깎이라는 말은 없다


“하고 싶은 일은 있지만 너무 늦은 건 아닌가요?” 이 질문 역시 거의 매일 받는다. 물론 사람에게는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인생의 속도와 일정표가 있다. 언제까지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워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표와 자기 것을 대조하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한다. 난 너무 늦은 게 아닐까? 내 기회는 이미 지나간 게 아닐까?

 

사람을 꽃에 비유한다면 사람마다 피어나는 시기가 다 따로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어떤 이는 초봄의 개나리처럼 10대에, 어떤 이는 한여름 해바라기처럼 20, 30대에, 어떤 이는 가을의 국화처럼 40, 50대에, 또 어떤 이는 한겨울 매화처럼 60대 이후에 화려하게 피어나는 거라고. 내가 쓴 <중국견문록> 중 ‘제철에 피는 꽃을 보라’라는 꼭지가 있다. 많은 독자들이 위안을 받았다는 대목이라서 여기 다시 옮겨 적어본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늦깎이라는 말은 없다. 아무도 국화를 보고 늦깎이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 뒤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철에 피는 꽃을 보라? 개나리는 봄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지 않는가."(원문)

먼저, 내 푸념 한마디. 한비야는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는 거야? 사람이 멋지기만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다음으로, 좀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족입니다. 글의 제목처럼 꽃 피는 때는 다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풀은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시들어 버리고 말기도 합니다. 환경 탓이지요. 예쁘다고 집에 들여놓고 나서 물을 안 줘 죽어가는 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같은 환경인데도 적응력이 뛰어나 꽃을 잘 피우는 것이 있을 테니 모든 것을 환경으로만 돌릴 수야 없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나오겠지만 환경이 어느 정도 조성됐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꽃을 피우는 데는 개인마다의 의지나 능력도 중요하지만 당사자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 구체적으로 말하면 특히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우리나라에서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미 옛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겨레>>의 조사를 그 증거로 들 수 있습니다.

지방ㄹ고 아버지 40% 중졸 강남ㄴ고 학·석·박사 78%


[교육불평등] 기획-“개천에서 용 안난다”
① 지역·고교유형별 계층 분리 실태
 
5개 고교생 심층질문 우리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미 옛말이 됐다. ‘교육을 통한 계층 고착화’는 사회통합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역동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겨레>는 계층·지역별 교육 불평등 실태와 대안을 다섯 차례에 걸쳐 짚어보기로 했다.

 

그 첫회로, 부모의 학력과 소득 등 사회·경제적 배경이 어떻게 자녀 세대의 교육 격차로 이어지고 있을까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지난 9~10월 서울과 지방의 고교 다섯 곳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를 벌였다. 서울에 있는 외국어고인 ㄱ고와 강남구의 인문계 ㄴ고, 서울에서 가장 교육 여건이 처진 지역으로 꼽히는 금천구의 인문계 ㄷ고, 충남 홍성 면지역에 있는 인문계 ㄹ고, 서울지역 실업계 ㅁ고에서 각각 한 반씩을 골랐다.

서울지역 외고와 강남구 인문계고 학생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 및 교육 지원 정도 등은 금천구와 홍성군의 인문계고, 서울지역 실업계고 등 다른 세 학교에 견줘 월등하게 높았다.

 

아버지의 학력을 보면, 강남구 ㄴ고는 응답자 32명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11명이 석·박사였다. 4년제 대학 졸업자 14명을 포함하면 고학력자 비율이 78%나 됐다. 외고인 ㄱ고는 23명 가운데 석사가 4명, 박사가 2명, 4년제 대학 졸업자가 14명으로 고학력자 비율이 87%에 이르렀다. 금천구 ㄷ고는 39명 가운데 석·박사는 한 명도 없었고, 4년제 대학 졸업자가 15명(38%)이었다. 홍성 ㄹ고는 25명 가운데 4년제 대학 졸업자가 2명, 실업계 ㅁ고는 26명 가운데 1명에 그쳤다. 반면, 중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은 ㄹ고가 10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ㅁ고가 6명, ㄷ고는 3명이었다. ㄱ고와 ㄴ고는 중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이 한 명도 없었다.

 

어머니의 학력에서도 ㄱ고와 ㄴ고는 각각 71%, 77%가 4년제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자였다. 반면, ㄷ고와 ㅁ고의 고학력자 비율은 13%, 8%였다. ㄹ고는 4년제 대학 졸업자가 한 명도 없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보면, 통계청의 표준직업 분류를 기준으로 고소득 직종으로 꼽히는 고위 임직원·관리자와 전문가에 해당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ㄱ고는 7명, ㄴ고는 10명, ㄷ고는 4명이었으며, ㄹ고와 ㅁ고는 각각 1명뿐이었다.

 

부모의 월 평균 소득이 500만원 이상인 고소득 가정은 ㄱ고가 9명으로 응답자 16명의 56%를 차지했다. ㄴ고는 24명 가운데 10명(42%)이었으며, ㄷ고는 26명 가운데 6명(23%)이었다. ㄹ고와 ㅁ고는 각각 2명(7%), 1명(4%)에 그쳤다. 반면, 가구 소득이 200만원 미만인 학생은 ㅁ고가 12명(46%)으로 가장 높았고, ㄹ고가 9명(33%), ㄷ고가 4명(15%)이었다. ㄴ고와 ㄱ고는 각각 2명(8%), 1명(6%)뿐이었다.

 

국회 교육위 김영숙 한나라당 의원이 서울대에서 받은 ‘출신 고교별 입학생 현황’ 자료를 보면, ㄱ고와 ㄴ고의 경우 2005~2006학년도 2년 동안 각각 76명과 51명의 합격생을 배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ㄷ고는 3명에 그쳤으며, ㄹ고와 ㅁ고는 서울대 입학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기사 원문. 여기도 보세요)

부모의 환경, 즉 부모의 사회, 경제적 배경이 자녀 세대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앞에 두고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꽃 피는 때 다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빈말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모든 꽃이 제때에 필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입니다. 나라가 세금을 잘 걷어서 어떤 아이가 환경 때문에 제 소질을 발휘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를 막아야지요.  

 

이런 일을 생각하면 나는 솔직히 우리나라를 떠나고만 싶습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세금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을 폭탄에 비유하는 저 조중동을 보세요.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 걸맞게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들은 왜 당연하냐고 할 것입니다. 능력이 뛰어나서 많이 버는데 왜 그것을 세금으로 내야 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란 게 뭔가요? 저 기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물림된 것이 아닌가요? 순전히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출발할 때는 비슷한 조건이라야 이긴 쪽이 떳떳하지 않을까요?

 

세상에서 말하는 능력이라든가 특권은 대체로 힘이 센 쪽이 배타적으로 그렇게 만든 측면이 강하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변호사나 의사가 왜 돈을 많이 벌까요? 얼른,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의사와 변호사가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숫자가 많다고 상상해 보세요. 현실과는 거꾸로 환자나 의뢰인이 큰소리를 칠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러니 기득권자들은 기를 써서 정원을 동결하려고 노력하는 거지요.

 모든 꽃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려면 다양성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은 특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자라지 못합니다. 내 집의 꽃만 예쁘다고 하는 편협한 마음도 다른 꽃을 무시하게 만듭니다. 다 아름다운 꽃이라고 여기면 굳이 내 자식만 호강시켜야 할 필요는 없지요. 우리 어른에게 자기만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넓은 마음이 참으로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