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동료 교수님을 보내고

귤밭1 2007. 6. 20. 16:58

우리 국문학과의 김웅배 선생님이 지난 일요일(2007. 6. 17)에 돌아가셨다. 췌장암에다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하신 지가 꽤 되었으니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5월말쯤에 이미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최종 선고를 내려서 우리 학과 교수들은 대기 상태로 있었고 학교장을 치르는 문제도 본부와 상의하여 결정을 받아놓았다. 부음을 듣고도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이 아니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저런 사정에 있었던 것도 한몫했을 터이다.

 

덕을 많이 베풀었던 분이라 많은 사람이 조문을 왔다. 우리 대학으로 오기 전에 중앙여고에 계셨는데 거기 제자들도 많은 것 같았다. 우리 국문학과의 제자들은 멀리서도 찾아왔다. 교수가 죽으면 저렇게 제자들이 많이 오니 좋겠다고 동료 선생에게 말했더니 정답게 굴어야지 아무한테나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내 얼굴이 시뻘개졌는데 아무튼 부럽다 싶게 사람들이 북적였다. 어디 공짜가 있겠는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이제부터라도 좋은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화요일에 영결식이 있었다. 조사를 들을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졸업생 대표가 울먹이면서 애도사를 읽고서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훌쩍일 정도로 울음이 나왔다.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영결식장에서 장갑이 왜 필요한지를 알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 데다 콧물까지 가세하니 장갑으로 모자라 나중에는 손수건까지 꺼내야 했다.

 

절정은 우리 국문과 허형만 교수의 조시 낭송이었다. 역시 시인인지라 낭독 자체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했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고 난 오열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도무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울음은 얼굴 부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동원되는 행위임을 나는 어제야 알았다. 둔한데다 다행스럽게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지 못해서 이리 늦되었던 것이다.

 

그냥 서러웠다. 그와 지내면서 얻은 좋은 기억도 이 서러움을 더 크게 했을 것이다. 우리 학교의 교수 채용에 응모해서 면접을 마치고 바로 올라갈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선뜻 당신의 연구실에 있던 간이 침대에 자라고 했다. 총장이 되기 전까지는 그와 나는 바둑 친구였다(아래에 있는 <김웅배 수필집 독후감>을 읽으세요). 내가 버릇없이 굴어도 그는 대범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좋은 분이어서 누가 일찍 데려간 것인지 모른다. 많이 울어서 내 더러움을 씻으라고, 살아서 이룬 것 다 허망하니 욕심 부릴 필요 없다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저리 급하게 떠나신 건지도 모른다.

 

김웅배 총장님, 고이 잠드소서.


* 총장의 조사

김웅배 총장님께서 돌아가시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가슴이 미어지고 슬픔이 눈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교정 곳곳에 총장님께서 심으신 소나무처럼 오래오래 우리 목포대학교의 번영과 발전을 지켜봐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이제 영영 총장님을 떠나보내게 되고 말았습니다. 먼저, 우리 목포대학교 교직원은 머리 숙여 삼가 총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총장님은 우리 대학교를 늘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교수로 계시면서 교무처장, 대학원장을 거쳐 총장을 지내셨습니다. 총장으로 계시면서 교육, 연구 봉사 방면에서 두루 큰 업적으로 쌓으셨습니다. 일일이 들자면 너무 길므로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총장님께서는 교육 과정을 개편하였고 행정조직도 재편하셨습니다. 지방대학으로서 늘 어려움을 겪어온 입학생 모집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셨습니다. 교수들의 연구 활동에도 아주 커다란 발전이 있었습니다. 연구비 수주에서 큰 성과를 올렸을뿐더러 누리사업을 비롯하여 지역 연대사업도 활발하게 벌였습니다.

또 총장님께서는 승달산이 연출하는 뛰어난 경관을 살리기 위하여 교정 곳곳에 산책로를 만들고 여러 그루의 노송을 심으셨습니다. 이제 제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는 소나무를 볼 때마다 총장님의 학교 사랑을 떠올립니다. 총장님은 가시지만 총장님의 업적과 학교 사랑은 저 소나무들처럼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총장님은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남도 문화도 진정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수집하신 1200여점의 서화, 그리고 총장님의 분신과도 같은 분재를 우리 학교에 쾌척하셨습니다. 총장님의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여 주신 사모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총장직을 훌륭하게 마치고서도 편찮은 몸으로 선생으로서의 유종의 미를 거두신다면서 강의를 하시다가 입원하시던 모습은 우리 교수들의 귀감이 되고 남습니다. 이런 말씀을 올리자니 평소의 정답고 소탈한 모습이 떠올라 목이 메어 말을 잇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총장으로서 학교를 대표하여 총장님의 높으신 뜻을 이어받아 학교 발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특별히 한 가지만 말씀을 올리려고 합니다. 김웅배 총장님! 총장님께서 그렇게 고대하고 노력하셨던 단과대학 복원의 꿈을 드디어 이뤄냈습니다. 총장님 영전에 이 기쁜 결과를 바칩니다. 총장님의 노력 덕분입니다.

존경하옵는 김웅배 총장님, 이제 이 세상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영면하십시오. 유가족과 우리 목포대학교 가족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이겨내고 총장님께서 아무 걱정 없이 잠드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삼가 인사 말씀 올립니다. 녹정 김웅배 총장님, 고이 잠드소서.

 


* 김웅배 수필집 독후감

 

고향 예찬, 마음 비우기, 균형 감각
―김웅배 수필집 <<내 안에 있는 나에게>>에 대한 간략한 독후감

 

다 아시다시피 수필은 붓 가는 대로 글쓴이의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이다. 이 글은 서평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자유롭게 수필처럼 적고 싶다. 내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기 때문이다.

김웅배 총장님(앞으로 나는 '그'라거나 '김웅배'라고 부르겠다. 자꾸 '총장님'이라고 되풀이하기가 어색할뿐더러 수필처럼 쓴다고 전제해 놓았지만 서평 형식이 요구하는 객관성을 아주 무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과 나는 바둑 친구다. 그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는 내 무례에 대해 얼굴을 붉힐지 모르겠다. 나이로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고, 교육 경력으로는 비교할 수 없이 그가 대선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처음부터 조금도 거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나를 대해 줬다. 직설적인 성격인 나도 내게 잘해주는 그가 좋아서 버릇없이 굴었다. 그가 이런 나를 늘 웃으면서 받아들여 준 것에 대해서는 나는 늘 고마워하고 있다. 그의 이런 넓은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추적하는 것도 이 글의 목표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두는 게 좋겠다.


'바둑 친구'라고 해 놓고는 다른 말만 해 버린 셈이므로 바둑 얘기를 좀 하자. 나는 어떤 글의 서두에서 그와 두는 바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나는 바둑을 즐겨 둡니다. 그렇다고 밤 12시를 넘기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만 졸릴 때나 책을 보다가 싫증나면 인터넷에서 바둑을 둡니다. 일년 전만 하더라도 교수 휴게실에서도 종종 두었습니다만 그 상대가 우리 학교의 총장이 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큰 즐거움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로서는 안된 일이지만 내 개인의 기쁨을 위해서 학교 일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전문)

농담 비슷한 말투지만, 그가 총장이 됨으로써 나는 갑작스럽게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총장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와 나는 맞수―기력은 부끄럽게도 밝힐 만한 수준에 있지 못하다―인데다 초속기여서 바둑 두기가 참 즐거웠다. 거의 같이 돌을 놓을 때가 있다고 하면 얼마나 빠르게 두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진행되다 보면, 절대로 안 무르기로 굳게 약속해 놓고도 호승심에 불타서 아이들처럼 물러 달라고 떼를 쓰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바둑이 끝나서까지 이런 '다툼'이 연장된 적은 한번도 없다. 바둑을 두면서 나는 상대방의 약 올리기를 즐기는데 그는 내 버릇없는 도발(?)에 정말이지 화를 내거나 정색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인생의 훌륭한 선배이면서 아울러 바둑에서만은,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계없이, 친구라고 여기고 있다. 그가 이 글을 읽고서 바둑 친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것만은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다.

같은 학과의 동료로서 겪은 바를 더 얘기하고 싶으나 할 일이 따로 있으므로 참을 수밖에 없다. 김웅배의 수필집 <<내 안에 있는 나에게>>(새미, 2003)는 다양한 세계를 보여 주고 있어서 한마디로 그 성격을 규정하기가 어렵지만 억지로 나눈다면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과 그곳의 자연에 대한 예찬, 주로 가족과 관련된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 사색적인 소재로서 이별이라든지 취미에 관한 것, 우리 문학 고전에 대한 해석과 평가, 윤리나 사회 문제 들을 다루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관심 영역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소재들을 관통하는 중심 성격을 고향 예찬, 마음 비우기, 균형 감각이라고 보고 싶다. 앞으로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그의 고향은 보길도이다. 여기서도 잠깐 옆으로 새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라겠다. 그의 고향 보길도에서 내 고향인 제주도가 "기라죽하게 보"인단다(327쪽). 그런데 보길도의 자랑인 고산 윤선도는 원래 제주도로 가려고 했던 것인데 거센 바람 때문에 우연히 보길도에 들렀다가 그 섬의 "비경에 이끌려" 거기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355쪽). 나로서는 고산을 보길도에 뺏긴 것이 몹시 안타깝다. 이런 것만 봐도 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를 닮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의 보길도 사랑은 그처럼 고향을 떠나 떠도는 신세인 내게는 공감을 주기도 하고 부러움을 느끼게도 한다. 그곳에 가 보지 못한 사람도 그가 안내하는 섬의 모습을 읽으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그림―그러고 보니까 그는 실제로 화가가 아닌가!―은 아주 구체적이다. 고향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날카로운 감각을 한껏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고향 예찬은 자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나 부모님에 대한 얘기도 따지고 보면 고향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다 할 것이다. "춘란의 구경을 캐서 깨끗이 씻은 다음 적당히 찧어 보릿가루 등의 곡기와 톳, 가시리 등의 해초를 버무려 떡밥 같은 것을 만들어 보릿고개를 이겨냈다"(12-3쪽)는 이야기를 들으면 저 정도는 아니지만 풍족하게 살지 못했던 내 어린 시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런 경험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이제는 과거의 궁핍함을 벗어났다고 하는 여유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큰 고통 없이 그 시절을 보낼 수 있게 해 준 고향의 따뜻함에서 말미암은 바가 클 것이다. 물론 아픔 같은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출세한 촌놈에게는 섬에 두고 온 어머니가 있는 것이다. 이 죄의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와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자주 하지 못하고 따라서 어머니에 대해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회한(<어머니의 단발>)은 같은 처지에 있는 독자의 가슴을 묵직하게 울린다.

그런데 나는 고향에 대한 그의 사랑을 그가 태어난 보길도에만 한정하여 읽고 싶지 않다. 고향이 그것뿐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가난할 것인가! 전라도 방언에 대한 글(<육자배기처럼 눙치는 전라도말>)이라든지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것에 대해서 아파하면서 강태공이 되어 "강태공의 곧은 낚시를 민중의 깊은 바다에 드리"워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후광 선생께>, 301쪽)도 다 고향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범위를 넓혀서 3부에 실려 있는 우리 고전 문학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나 한복에 대한 경탄할 만한 관찰은 다 고향 사랑에서 나온 것으로 읽고 싶다. 한복에 대한 글은 그의 섬세한 관찰안을 드러낼 겸하여 좀 길지만 꼭 읽어 드리고 싶다.

한복을 입은 여인은 몸뚱이가 없다. 그들의 욕망의 가슴도, 뿔이 날 수도 없는 엉덩이도, 처용 아내의 가랑이도, 진 데를 밟을 수도 있는 발걸음마저도 없어져 버린다. 다만 육신이라는 형상만 있고 그 형상 위에 나비의 날개처럼 한복이 걸쳐진 것이다. 양장은 몸의 굴곡을 최대한 살려 그 여인을 나방으로 만드는 반면 한복은 같은 여인인데도 금방 나비로 만드는 특별한 마술을 지닌 여인의 날개다. 나비는 몸뚱이가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방은 몸뚱이 위주다. 나방은 두툼한 몸뚱이에 날개짓도 둔탁하다.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몸뚱이가 크기 때문에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주로 밤에 움직인다. 몸뚱이와 밤은 깊은 상관성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어 흥미롭다.

(중략)

춤은 '추다, 추겨 올리다'에서 온 말이다. 무엇을 추고, 무엇을 추겨 올린다는 말인가? 그것은 어깨와 손을 추겨 올린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통춤은 어깨와 손의 동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여기에 상응하여 발동작이 뒤따른다. 특히 승무나 나비춤 그리고 학춤은 더욱 그렇다. 우리의 춤은 원래 종교의식에서 분화된 것이라 비는 동작과 관련되고 더구나 한복을 입고 추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춤에서 이성간의 접촉이나 성적 동작을 미화한 것 같은 야릇한 동작이 우리 춤에는 없다. 그들의 춤이 육체의 접촉이나 몸놀림에 초점에 맞추어진 것은 그 형성 연원이나 의상과 전연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한복과 나비>, 121-2쪽)

워낙 짧은 내 견문으로는 이 주장이 사실과 걸맞은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개연성을 지닌 해석으로 보인다. 그런데, 혹시 이 부분만 읽고서 그를 속이 좁은 지역주의자나 배타적 국수주의자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 그는 이 수필집의 여기저기에서 서양의 고전을 인용도 하고 수필의 소재로 삼고 있기도 하다. 그의 박람강기는 놀라운 데가 있다. 그와 자리를 같이해 본 이들은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영시를 암송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고향 사랑은 편벽된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함께 추구하는, 마지막에 살펴볼 균형 감각의 산물이라고 해야 맞다.

이제 그의 '마음 비우기'를 살필 차례이다. 그는 총장이 되고 나서, 애써 모았던 고서화를 학교에 기증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그의 쾌척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었을 줄 안다.

30여 년간 수집했던 고문서, 간찰, 서화 650점을 대학 박물관에 기증했다. 일부 신문과 방송에서 여러 차례 보도해 주면서 자꾸 무슨 뜻으로 기증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덜어내기'라고만 가볍게 응답했다. 더 가볍게 대답하면 '주고 싶어서'라고 하면 될 것이다. 좋아서 모았고 주고 싶어서 주었을 뿐이다. '아깝지 않더냐'고 묻기도 했다. 자기의 물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마는 '주는 재미도 있다'고 대답했다.(<나 하나 주고 가지>, 184쪽)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저 공자의,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말씀을 떠올렸다. 좋아서 모았다고 했는데 "서화를 돈의 가치로 따져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사 모은 것도 아니다"(185쪽)고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좀 어려운 말로 외부적인 목적이 없이 그 자체로 좋아서 그랬을 뿐이다. 참다운 즐김의 경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는 재미가 있다'는 대답도 나올 만하다. 이 마음 비우기가, 까마득한 후배의 앞뒤 못 가리는 말과 행동을 따뜻하게 보게 해 주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마음 비우기가 가져다 주는 행복은 자식처럼 아끼던 것을 실제로 내줘 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어서 나 같은 사람은 그가 직접 얘기해 주기 전에는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고서화를 기증하듯이 "30년 가까이 품에 안고 살면서 애지중지했던 두 딸"(186쪽, 참고로, <의자>는 그의 가족의 가난한 살림과 두 딸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보석이다.)을 결혼시키고 나서 허전함을 채워 주고 남을 큰 선물을 받았다. 바로 외손자들이다. "나는 그냥 주었는데 결국 그냥 준 것이 아니고 더 큰 것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무상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여기에서, 기증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구했더니 망설이던 끝에 "기왕 줄 바에야 다 주어 버립시다"고 하여 쉽게 결행하도록 한 그의 "집사람"(186쪽)의 기여도 우리 학교는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 두고 싶다. 그 남편에 아내다!

이 마음 비우기가 그에게 집착을 경계하고 이별이나 죽음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는 이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 놓고 있다.

우리들의 삶은 수없이 많은 이별 연습이며 그것은 결국 죽음의 예행 연습이요, 죽음에 대한 길들이기이다. 낙엽이 가지를 떠나듯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곁을 떨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여 자식들만이라도 내 곁에 항상 있어 줄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며 헛된 기대다. 그들도 크면 나보다 더 좋은 대상이 생길 것이고 언젠가는 나보다 그들이 더 가까워지면 내 곁을 미련없이 떠날 것이 아닌가? 하여 삶은 이별 연습이며 이별 연습은 죽음에 대한 길들이기가 아니겠는가?(<이별 연습>, 60-1쪽)

전문가의 경지라고 알려져 있는 그의 분재도 이 마음 비우기의 연습이고 실천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인간의 소유욕을 만족시키면서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연에 접근하는 길"(336쪽)을 든다. 그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가 분재나 수석이다. "분재는 결국 자연에로의 복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연에서 배우라'가 분재 수업의 제1 계명이다." 그러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우리가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자연미뿐만이 아니다. 자연의 섭리와 이법에 순응하고 겸허할 줄 아는 마음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흔히 예술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예술가의 괴팍한 성미에는 언짢아하는 마음을 가지는데 분재인의 오만기나 편협한 아집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에 실망한 나머지 분재가 생산품으로, 분재인이 기능공으로 전락되는 예를 자주 본다. 우리가 분재를 대할 때 세월이 흐르면서 가다듬어진 분재의 모습만 볼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다듬어진 분재처럼 자기의 마음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분재를 가까이하려는 분들에게>, 338-9쪽)

여기에 "기다림의 미학"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분재의 미는 세월이 엮어 주며 생명에는 비약이 없"기(340쪽) 때문이다. 그는 "최소한도라도 10년은 기다리면서 나무를 만들어야 한다"(340쪽)고 말하고 있다. 그의 "자연 친화적 삶"(326쪽)의 비결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의 균형 감각을 다룰 차례이다.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는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법이 없다. 마음을 비우는 연습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취미의 순기능을 강조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취미의 단점은 지나친 집착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취미는 '그저 좋아하는 것'이기에 광적 집착과 남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 아집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 취미가 도를 넘을 때 우리는 취미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자기의 철학이 노예 되기를 기꺼이 수용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주변 사람이 고달플 수도 있다. 이럴 때 취미는 자기의 문을 닫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취미>, 91쪽)

분재에 대해서도 위와 꼭 마찬가지로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다. "자연미에 도취되다 보면 인간사가 부질없고 세사가 번잡할 뿐이다. 그래서 자기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뒤바뀌거나 그것에 대해 소극적일 수 있다"고 경계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분재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격려자가 되어야 하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야 한"다(341쪽)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짙은 화장과 같은 지나친 외면 지향에 대해 우려한다거나(<여자의 입술>), "사랑과 인격이 결합되지 않은 성행위는 부도덕한 유희일 뿐이며 파멸과 타락의 길일 뿐"(281쪽)이라고 설파하는 것도 다 균형 감각의 소산이다. 한국 교회의 지나친 편협성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는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기를>은 그의 균형 감각의 정수를 보여 주는 글인데 나는 아주 깊은 공감을 갖고 읽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감도 했고 부러움도 느꼈지만 아울러 내 탐욕에 대한 아픈 반성과 체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들이 이 수필집의 제목 그대로 '내 안에 있는 나에게' 말을 건네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통 없이 어디 즐거움만 있으랴! 진정한 즐거움은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고통스러운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결국 김웅배의 수필집을 읽는 시간은 즐거웠다고 다시 고쳐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책 속으로 난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삶은 내 것  (0) 2007.07.04
강연, 걷기  (0) 2007.06.25
컴퓨터와 오디오 스피커를 연결시키는 방법  (0) 2007.06.10
평양냉면 드세요  (0) 2007.06.06
세상에서 가장 슬픈 클래식  (0) 2007.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