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 광주 남부경찰서에서 주최하는 논술경시대회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가 그 대상인데 내 강연 내용도 내용이지만 학생들이 떠들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는데 이외로 조용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사람은 멋대로 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하면서까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오늘 이 시간에도 듣고 싶지 않으면 얼마든지 안 들어도 되고 따라서 자도 좋지만 떠들어서 다른 사람이 신경을 쓰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간절하게 호소했지요. 한 시간 동안 얘기했는데 자는 아이는 거의 없었고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에 초등학생 몇이 얘기를 할 뿐이어서 분위기가 괜찮았습니다.
강연 내용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어떤 게 좋은 글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논술이 강조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회가 합리적으로 나갈수록 사회생활하거나 취직하는 데 글이 필요해진다고 했지요. 나를 드러내는 최적의 도구니까요.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를 가꾸는 데 글이 없어서는 안 되는 수단이라는 점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글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게끔 하여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주니까 이런 것에 비하면 앞의 실용적인 측면은 좀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글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내가 쓴 글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할게요.
학생을 따라온 엄마와 선생님도 몇 보이길래 그들에게도 부탁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개성적인 글을 쓰자면 아이가 자율적인 존재라야 된다고요. 그러니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다 평생교육원에서 주부들에게 하는 말을 덧붙였지요. 자식을 남처럼 대하자고 말입니다. 중요한 얘기라서 여기에서도 되풀이해야겠어요. 우리 옆집에 불쌍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그 이웃 때문에 밥을 못 먹거나 잠 못들 정도로 괴로워하지는 않습니다. 자식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잘 살아도 못 살아도 그게 다 아이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도 부모도 편해지지요. 쓸데없이 신경 쓰는 일이 없어지니까요.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여러 가지로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글쓴이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물론 그 의도가 뻔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깊이와 보편성을 갖춘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 이러한 내용의 질은 평생에 걸쳐서 끊임없이 배우고 읽고 쓰고 해야 겨우 그 그림자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일종의 유토피아인 셈이다. 전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면서도 실현되지는 않는 상태 말이다. 그러니 좋은 글 못 쓴다고 가만히 앉아서 한탄할 것이 아니라 부지런하게 읽고 생각하고 써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성의다.
아무튼 내용의 깊이나 독창성, 보편성을 갖추는 일은 위에서 말한 대로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이니까 각자의 노력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나는 좋은 글이 갖추어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구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내 앞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하자. 내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얘기해도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그 꽃이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왜 입 아프게 하느냐고 역정 낼지도 모르겠지만 나쁜 글의 경우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글이 이외에도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반응할 일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의 공감을 얻는 글이 되려면 꽃의 모양이라든가 향기라든가를 마치 눈앞에서 그 꽃을 보고 냄새 맡듯이 보여 줄 수밖에 없다. 이게 구체성이다. 좋은 글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교훈적인 성격도 이 구체성에서 나온다고 해도 좋다.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하자는 말 대신에 그렇게 하는 모습과 그렇게 하여 얻은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면 독자들은 ‘아! 이러니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런 차원의 구체성을 직접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다루는 대상을 우리 감각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듯한 느낌을 주게끔 제시해야 한다.
구체성에는 또 다른 뜻도 들어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어떤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숨은 맥락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러한 연관성을 보이게 해야 좋은 글이다. 그러니까 구체성이란 말은 전체를 이루는 요소들의 연관 관계를 드러낼 때 얻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좀 어려운 말로 매개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 구체성은 매개된 직접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 이르러서야 참다운 구체성을 이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말로는 전체와 부분의 변증법이라고도 부른다.
사람은 그의 현실의 부분과 전체를 보고 산다. 그러나 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나 이를 의식 속에 투영하여 파악함에 있어서 전체와 부분의 균형을 바르게 유지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 균형을 유지하려면, 긴장과 갈등과 투쟁을 무릅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긴장이 커짐에 따라 많은 경우 우리는 현실의 한쪽을 선택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한쪽만의 선택은 우리에게 현실의 전모를 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의 부분에 눈길을 모으고 그것을 틀림없이 포착하려고 하면, 이 부분은 그것을 포함하는 전체에 의하여 뒤틀리고 제약되었음이 드러나게 되고 따라서 우리가 보는 부분은 현실의 참된 모습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현실의 전체를 보는 눈은 사람의 세계와 생리적으로 감각적으로 교섭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명백한 사실인 구체적인 사실을 잃어버리고 만다. 언제나 전체가 부분의 총화보다 크다고 하더라도 전체는 부분의 집합에 기초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생존에 의하여 매개되지 않은 어떠한 전체적인 현실도 참다운 의미의 전체일 수 없고 단지 퇴화된 전체의 겉껍질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의 현실을 의식의 대상으로 또는 의식적인 의도의 대상으로 삼고자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에 부딪치게 된다.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1977, 12쪽)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바로 이 변증법의 구체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나무를 아무리 자세하게 그리고 직접 보듯이 묘사했다고 해서 나무를 다 드러냈다고 할 수는 없다. 숲과 연관해서 어디쯤 자리 잡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야 어느 정도 나무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매개된 직접성은 자연스럽게 복잡성이라는 또 하나의 좋은 글의 조건에 연결된다. 여기서 복잡성이라는 말은 우리가 다루는 대상의 전체적인 측면을 뜻한다. 대상을 단순하게 어떤 하나의 성질만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다든지 긍정적인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부각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이 복잡성을 존중하는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특히 주장을 내세우는 글에서는 이 복잡성을 고려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내 주장이 옳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주장에 반대되는 측면을 배제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한 신념이 경직화되는 폐해가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복잡성을 존중하는 눈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사실 앞에서 겸허한 태도를 길러야 한다. 내 신념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실을 존중하겠다는 태도를 갖추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은 자존심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하면 자존심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무한히 열려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꿈의 해석의 결론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쁜 아주 부도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나는 젊었을 때 나의 은사 샤르코 선생이 이와 같은 경우에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현실에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한다면, 겸허한 태도로 자기의 동정심이나 반감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프로이트, 김성태 역, <<정신분석 입문>>, 삼성출판사, 1990, 157-8쪽)마지막으로, 답을 바로 제시하는 것보다 그것에 이르기 위해 논의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답보다는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수학 문제 풀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글에서도 꼭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글은 그 종류에 관계없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을 완벽히 갖추는 것은 어렵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경지에 쉽게 이르는 직선적인 길도 나 있지 않다. 앞에서 말한 대로 쉬지 않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게 겨우 그 길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건을 읽고 생각하고 쓸 때마다 의식적으로 고려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읽을 만한 글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문제는 여러분의 노력과 성의이다!
이제 방학이 되면 아이를 학원에 보내 책 공부에만 묶어두지 말고 아이 혼자서나 친구 몇이서 여행 같은 것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어른들도 자율적인 존재로 크지 못해서 외국 여행 가면 떼거리로 몰려다닌다고 했습니다. 가고 싶은 데 가서 빈둥거리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며칠씩이 머무는 것이 여행인데 우리 어른들은 학교를 졸업해도 여전히 아이인 채로 남아서 학교 시절의 수학여행 가듯이, 무슨 과제를 하듯이 미리 짜인 일정을 묵묵히 따라한다고 했지요. 내가 실제로 그랬으니 그리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 '경찰서에서 논술 경시대회를 열다니' 하는 생각을 하는 분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경찰서는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데니까요. 그래서 경찰서장에게 물어 봤지요. 왜 이런 데서 저런 대회를 여느냐고요. 서장님은, 논리적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합리적으로 설득하고 토론하면 함부로 감정이나 폭력을 동원하는 일이 줄어들 테니 그만큼 사회가 편안해진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인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하신 분이었습니다. 내 강연도 끝까지 들어서 나중에 마무리 인사를 할 때 정확하게 요약해 주시더라고요. 경찰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평소의 인상을 씻어내고도 남았습니다.
시상식을 마치니 저녁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가면 일요일에 다시 내려와야 하니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하루쯤 걷자는 생각도 서울로 가는 발걸음을 막았고요. 그래서 일요일은 마음먹은 대로 걸었어요. 10시 40분쯤에 연구실에서 출발하여 무안 읍내, 무안병원을 지나 몽탄역을 거쳐 파군교에서 장부다리로 오는 샛길로 해서 장부다리를 지나 학교로 왔지요. 7시 다 되어서 학교 옆의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점심 시간을 빼고는 거의 쉬지 않았으니 강행군인 셈입니다. 8시간 동안 35킬로미터 정도는 걸었을 거예요.
날씨가 하루 종일 흐린데다 가끔식 비가 흩뿌리기도 해서 걷기에는 그만이었답니다. 오랜만에 땀을 많이 흘려서 기분이 참 좋았어요. 무안병원서부터 장부다리까지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이제 방학이니까 주중에도 시간을 내어 돌아다녀야겠어요. 특히 햇빛이 안 나는 장마철에요. 여러분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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