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내 삶은 내 것

귤밭1 2007. 7. 4. 15:38

전에는 금요일의 <<한겨레>>을 기다리는 것이 큰 기쁨이었는데 요즘에는 바뀌어 목요일치가 좋다. 지금도 여전히 토요일에 '책과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전 금요일의 '18.0도'(<금요일의 <<한겨레>>>를 보세요)를 대신하고는 있지만 김선우나 이지누 같은 좋은 필자들의 산문이 빠져서 읽는 재미가 없다. 그냥 평범한, 다른 신문과 큰 차이가 안 나는 신간 소개처럼 되어 버린 느낌이어서 몹시 안타깝다(왜 우리 신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책을 소개할까?).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목요일에 '매거진 Esc'가 나오기 때문이다. 나온 지가 몇 차례가 안 되지만 꽤 성공적이다. 특히, 여기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요리사 X와 김중혁의 음식 잡담>(여기를 보세요)이라든지 <스스무 요나구니의 비밀의 주방>과 같은 연재물은 먹을 것이면 가리지 않는 내 낮은 미각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줄 것만 같아 밑줄 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 많이 접하다 보면 내 꿈의 하나인 요리 배우기에도 한 발자국 가까이 갈 수 있다는 희망도 품으면서....

 

저런 기획도 좋지만 그래도 내게 이 특집란의 압권은 격주로 연재되는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다. 전에 연재했던 김형경의 상담(여기를 보세요)하고 비슷한데 얘기하는 방식이 훨씬 직설적이고 유모어-어떤 경우에는 풍자와 조롱-가 깔려 있어서 흥미 만점이다. 어조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로도 아직 근대적인 개인이 못 되어 늘 유아 상태로 있는 우리들에게 계몽적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에서 즐거움과 교훈을 함께 얻고 있다.

 

재미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바로 김어준의 글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말투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고 뜻을 음미하기 바란다.

남친이 자꾸 보챈다구요? 너~무 정상!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안녕하세요. 전 스물세살이고요, 제 남친은 스물여덟입니다. 사귄 지는 한 달 좀 넘었고요. 만난 지 일주일 만에 사귀었고, 사귀자마자 계속 자자고 그러더군요. 결국 사귄 지 일주일 만에 술먹고 사고쳤어요.

 

솔직히 술먹고 사고친 건 나니까 누굴 원망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자고 나서 기분이 좋지않더란 말이죠. 그 후에도 자꾸 관계를 요구하는 남친한테 싫다고 거절했어요. 그러다가 좀 친해져서 남친 집에 가서 영화 보다가 또 관계를 맺었는데, 이번에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죄책감과 두려움과 왠지 내가 바닥으로 내려간 느낌,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 진도가 빠른 것 같기도 하고, 날 아껴주지 않는 것 같아서 남친한테 약간의 섭섭함도 들고요.

 

그런데 만날 때마다 남친은 나에게 자꾸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싫다고 죄책감 든다고, 내가 아닌 것 같다고,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진지하게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나한테 그러더군요. “그럼 다른 식으로라도 해주면 안 돼?” 정말 ‘뜨헉’했습니다. 이젠 수치심까지 느낍니다. 생각할수록 자꾸 화가 납니다. 통화하고, 얼굴보며 다른 얘기할 땐 참 행복한데, 휴, 미치겠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

 

A  1. 오우, 학생. 나, 당황스러워요. 선생님 구구단은 어떻게 외워요, 레벨의 질문인지라 명색이 미적분 강사로서 자괴감마저 들라고 그래요. 하지만 쇼는 마스트 고 온 이니까. 자 갑시다. 학생, 그 남친, 학생이 짐승으로 간주하는 그 남친, 상태, 너-무, 정상이에요. 너-무 정상이라 선생님이 할 말이 없어요. 만약 그 남친이 아직 손목 한 번 안 잡고 구름 쳐다보고 만날 시나 읊조리고 지구 온난화 걱정만 하고 자빠졌다. 그럼 선생님한테 델구 오세요. 몇 가지 기능장애 체크하고 아주 혼꾸녕을 내 줄테니까. 유치하기 짝이 없는 협박과 회유에다 알랑거리고 토라지면서 한 번만 하자고 시도 때도 없이 보채질 않는다 …. 그럼 그 남친, 치료받아야 해요. 근데 그 남친은 어떻게 한 번 해 보려고 온갖 시답지 않은 수작을 다 부리잖아요. 아-주 정상이에요. 그럼 첫 번째 챕터 <제 남친은 짐승인가요?>는 여기서 마치기로 해요.
 
* 요약 - 남친은 짐승인 게 옳다.
* 공부할 문제 - 그럼 질문한 학생은 뭘까~요?
1)선녀 2)아바타 3)봉제인형 4)자웅동체 5)짐승
 
2. 두 번째, <저는 죄인인가요?>. 학생이 말한 느낌 - 두려움, 바닥에 내려간 느낌,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수치심 등등의 제목은? 죄의식. 좋아하는 남자랑 좋아서 했는데 대체 그게 어서 왔을까. 정답. 남자들이 발명했다. 진짜? 진짜. 왜. 다른 놈들이 지 여자 채 가는 게 겁나서. 여자들 꼼짝 못하게 하려고. 정말? 정말. 섹스에 관한 한 수컷들은 다른 수컷들 절대 못 믿어요. 그래서 수컷들은 대신 암컷들을 통제키로 한 거예요. 정절, 순결 따위의 족쇄 이데올로기를 고안한 거죠. 열녀비가 뭐예요. 남자가 지 죽고 나서조차 여자가 딴놈한테 가는 게 싫은 거라. 죽을 때조차 곱게 안 디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이란 게 다 권력의 문제라는 거예요. 힘있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를 신화화해 불변의 질서인 양 유포하는 거죠. 종교도 동원되고 문학도 동원되고. 상징체계는 다 동원돼요. 그래서 남자들의 욕심이 합법, 율법, 도덕으로 변장을 하죠. 생각해 봐요. 여자가 불편한 걸 여자가 왜 만들었겠어요. 여자가 불편한 건 다 남자들이 발명한 거예요. 그리고는 어릴 때부터 학습시켜 스스로도 믿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혹여 그 경계를 밟는 행위는 다 품성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리죠. 저렴한 년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죠. 그래서 항상 감시하지 않아도 여자 스스로 저어하도록. 바로 학생이 지금 그러고 있는 것처럼. 사회가 포르노를 통제하는 원리와 여성 통제의 원리가 똑 같아요. 19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음란물에 관한 법률 제정 이유가 뭔 줄 아세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푸하하. 자, 이 말 외워둬요. 성은 권력의 문제다. 끝.
 
* 요약 - 죄인은 누가 죄인이야, 이 씨바들아!
* 공부할 문제 - 유럽 68세대는 왜 포르노를 합법화했을까요?
 
3. 마지막 , <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학생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꼴리면 하고 안 꼴리면 하지 말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중요한 건 섹스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삶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온전히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예요. 삶에 대한 통제권에 밑줄 쫙. 남들이 강요하는 규범에 대해선 힘차게 팍뀨를 외쳐주세요. 그리고 남친의 문제는 딱 하나. 들이대는 방식이 촌스럽다는 거. 그러니 학생이 지금 해야 하는 고민은 나는 죄인일까요 흑흑, 이 아니라 이 무식한 수컷새끼를 대체 어떻게 세련되게 사육하지, 예요. 강아지 있죠. 그거 한 마리 키운다고 생각해요. 그까이꺼.
 
* 참고 - 변태는 없다. 취향이 있을 뿐. 그러니 언제나 중요한 건 합의.
* 공부할 문제 - 왜 섹스는 아름다워야만 한다는 걸까요
 
* * * 지금까지 입문반에 땜빵 온 시간강사 어성애였습니다. 꾸벅. * * *

 

*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는?

배우이자 뮤지컬 제작자 박해미씨와 딴지일보 총수이자 방송인 김어준씨가 독자들의 ‘관계 개선’ 상담가로 나섰습니다. 부부관계, 가족관계, 직장 내 관계, 애인 관계, 친구 관계 등 살면서 엮이게 되는 인간관계의 고민에 대해 매주 번갈아 시원하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상담을 원하는 독자는 고민 상담메일(gomin@hani.co.kr)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100% 비밀보장, 100% 고민해결을 책임집니다. (편집자)
(원문)
 

결혼 2다리 저울질? 그게 뭐 보장자산인가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올해 26살의 직장인입니다. 23살 때부터 3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처음 사귈 때 학생이었고 사는 지역이 달라 한 달에 몇 번 못 보지만 서로 집안도 오갔지요. 전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중퇴하고 일하고 있었고요. 그렇게 사귀다가 결혼 얘기를 꺼냈는데, 졸업하고 자리 잡히고 돈 좀 모으면 결혼하겠다고 하더군요. 그 전에 결혼하더라도 남자 집에서는 도와줄 능력도 있었고 어머니도 반대하시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렇다고 저에게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 말만 하면 알면서 또 그러냐고 화만 내고. 저희 집안에서는 약혼이라도 하라고 성화시고. 그러다 올해 4월 남자친구는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나갔습니다. 그즈음 저에게 대시를 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마음이 점점 기울어지더군요. 물론 전 그에게 남자친구 얘기도 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났고, 혼자 힘들어하다가 절 못 잊겠다며 찾아온 그 남자에게 전 결국 넘어갔어요.지금은 서로 장래를 약속하며 결혼 자금을 모으고 있죠. 전 남자친구에게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은 힘들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3년이란 추억을 무시할 수 없더군요. 자꾸 생각나기도 하고. 그렇다고 지금 남자친구가 싫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어떤 것이 진짜 사랑인지, 진짜 제 인연인지 잘 모르겠어요. 8월에 한국에 한 번 들어온다고 하는데, 그때까진 마음을 결정해야 하는데, 제 마음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떡하죠?

 

A 오, 이거 완전 자잘한 질문의 아수라장이네. 할 수 없다. 어수선하게 가자.

 

1.우선, 오버랩 양다리 시추에이션. 들키지 마. 약조 없는 별리는 그의 선택. 원천 귀책사유 그에게 있다고. 당신은 ‘후’남친 대시에 ‘선’남친의 존재, 고지했다며. 게다가 ‘선’에게 통보 결의도 했고. 그 정도면 양호한 염치야. 들키면 당신이 아니라 상황이, 사건을 진행한다고.

 

1-1.‘선’의 “자리 잡고 돈 좀 모으면.” 이 꼭 핑계만은 아냐. 수컷의 결혼 공포는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 말미암은 사회경제적 부하에서 주로 기인한다고. 선사부터 그래 왔어. 과연 현재 근력과 경험치로 여타 수컷들과의 먹이경쟁 속에서 매번 사냥에 성공해 식탁에 식량 조달 해낼 수 있겠느냐. 그래 미루는 거라. 하지만 그런 연유로 순연된 결혼이 성사되는 법, 드물지. 언제나, 좀 더, 숙련된 사냥꾼, 존재하거든. 어리석어 불쌍한 수컷들이여.

 

1-2. 부모님 약혼 성화는, 그 놈이 먹고 튈까 봐. 근데 그리 묶어둬 뭐 하게. 제 발로 기꺼이 걸어 들어오지 않는 모든 관계는 당신이 빚지는 거야. 관계 균형, 무너져. 관계의 채무 탕감이 금전 변제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야.
 
2. 당신은 지금 연애가 아니라 결혼이 하고 싶은 거라. 근데 왜 당신이 그 나이에 벌써 연애하는 족족 결혼에 안달인지 알고 있나. 그거 결혼을 불확실한 당신 삶에 대한 보장자산으로 간주해 그런 거거든. 타박하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이유는 알고나 안달하라고.

 

2-1.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이야. 당신만 불안한 게 아냐. 그걸 스스로 감당하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어른이 돼. 그게 무서워 질질 짜는 것까진 괜찮아. 다들 그러니까. 하지만 그걸 남이 대신 해결해 주길 바라진 말라고. 남자가 능력 없는데 그 집이 능력 된다는 게 어떻게 당장 결혼의 조건이 되나. 그 집과 결혼하나. 그건 성장지체를 넘어 노예근성이야.

3. 당신이 왜 선택을 못 하는지 아나. 진짜 사랑을 몰라서가 아냐. 잘못 선택하면 손해날까 두려운데, 대체 잘, 선택하는 게 뭔지 자기도 몰라 황망해 그러는 거야. 선택은 상대가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달린 거라고. 당신은 당신이 무엇으로 행복해지는지 알고 있나.

 

3-1.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거, 일종의 신화야. 사랑으로 결혼해도 불행해지는 커플 부지기수고, 조건 맞춰 결혼해도 잘 사는 이들 적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떤 것인가에 있는 거야. 돈과 외양이 훨씬 중요한 사람도 있고 생의 불확실성과 흥분을 함께 누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고. 결혼에서 가장 먼저 할 질문은 ‘누구랑’이 아냐. ‘나는 언제 행복한가’라고. 사랑이냐 조건이냐, 따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지가 어떤 놈년인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것만 따지고 자빠진 거, 그게 멍청한 거라고.

 

4. 내 결론은 그래. 결혼, 아직, 마. 행복은 가르칠 수 없는 거야. 겪는 수밖에 없다고. 배신, 당해도 보고 배신, 하기도 하면서 이놈과 지져도 보고 저놈과 볶아도 보는 걸 적어도 열댓 번은 진심 다해, 해본 후, 해도, 해.

 

4-1. 그래도 꼭, 지금, 해야겠다면, 이거 하나는 명심하라고. 결혼은 숙명이 아니라 제도야. 사람들이 발명, 한 거라고.

 

* 덧붙임 결혼 제도의 절대 위상은 21세기와 함께, 저문다, 는 게 내 생각이야. 굿럭, 베이뷔. (원문)

요약하자면, 내 삶은 내 것이니 내가 책임을 지고, 아이처럼 응석 부리지 말자는 것이다. 자식을 내 자신처럼 생각해서 자식이 공부하는 시간에 바보같이 잠도 안 자고 자기 계발에는 신경도 안 쓰는 우리 엄마들에게 꼭 들려 주고 싶은 얘기다.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나다. 그러니 내 삶을 살자!

 

원론적인 차원에서야 '내 삶을 살자'고 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런데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 사는 데 익숙지 않아서 삶의 구체에다 저 원칙을 적용하자면 멈칫거려진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김어준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무슨 얘길 할 것인지 궁금해서 목요일이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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