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어떤 제자의 편지

귤밭1 2007. 7. 24. 20:50

오늘 우리 국문학과를 졸업한 제자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편지 임자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옮깁니다. 한편으로는 할 말이 없어 제자의 편지로 대신하는 마음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모로 학생이 나를 살려 줍니다.

 

오랜만에 편지로 인사 드립니다. 무더위에 잘 지내고 계시죠? 저도 잘 있습니다. 이번주면 장마가 끝이 난다고 합니다. 비가 별로 온 것 같지도 않은데요. 아무튼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를 뒤엎고 하루종일 후텁지근하네요. 갑자기 방학이면 늘 도보여행을 떠나시던 교수님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안부 겸, 오래도록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도 실어 편지를 씁니다.

 

교육대학원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뒤늦게 영어공부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야할 곳의 방향을 잡지 못해 졸업을 전후로 힘들었었는데, 지금도 뚜렷이 정해진 것은 없지만 전념하는 무언가가 있어 한결 안정되고 행복한 마음입니다 요즘은. 

 

간만에 책을 읽었습니다. 신경숙의 신작 <<리진>>인데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예전 '한국현대소설의 이해' 들으면서 교수님 홈페이지를 접하니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에 관한 글이 있어 그걸 시작으로 신경숙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었습니다. 작가의 글이 처음에는 저를 차분하게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 좋았는데 읽을수록 우울하고 슬픈 느낌이 강해 얼마간은 읽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작이 나왔다는 소릴 들었고, 마침 알라딘에 적립돼 있는 돈이 있어 그걸로 두 권을 샀지요. 그런데 하루 반 만에 두 권을 모두 읽어버렸습니다. 간밤에 새벽 4시가 가까워 오도록 책을 읽었던 게 얼마 만인가 싶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울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작가가 몇 년에 걸쳐 쓴 글을 겨우 하루 반 만에 다 읽어버린 게 조금 아쉽다는 생각도 들어 블로그에 후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짤막하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러고 나니까 교수님 생각이 났습니다. 늘 영양가 있는 작품을 맛있게 읽고나서 포만감이 느껴질 때면 교수님께 글을 쓰고 싶어지는 거요.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교수님 덕에 처음으로 진득하니 앉아 책 읽은 즐거움을 알게 되어 그런가 봅니다. 어쩌면 교수님께 자랑하고 싶어서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이래저래 여러 이유로 교수님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리고 제 졸업식때 상 받은 걸 축하해주셨는데 그에 대한 답장도 드리지 못해 늘 마음 한켠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오늘 이 편지를 계기로 너무 늦었지만 감사하다는 말도 드리려구요.

 

교수님께 이런 말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한번 더 하려구요. 제가 대학에서의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나도 잘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신 것은 교수님의 '한국현대소설의 이해' 과목 덕분입니다. 1학년 때 두 번이나 학사경고를 맞고 아빠께 학교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엄청 혼났던 저였어요. 그리고는 부모님께 아무런 말도 없이 1년을 휴학하고 복학할 때에도 별 의지나 생각 없이 학교에 나갔던 저였습니다. 교수님 수업도 다른 과목은 다 인원이 차 버려 할 수 없이 들었던 겁니다. 교수님의 그 수업에 관한 소문이 자자해서 처음부터 긴장을 많이 하고 수업을 들었던 게 아마도 제가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나 봅니다. 수업에 열중하다보니 궁금한 것이 생기고, 그걸 교수님께 여쭤보니 늘 자상하게 설명해주시고... 그러다 보니 교수님이 좋아져 과제도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교수님께 칭찬도 받고... 온통 F뿐이었던 제 성적표에 처음으로 A플러스라는 글자가 보였을 때 제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때를 계기로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덕분에 졸업하면서 그런 상까지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열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무언가에 열중하면 꼭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도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열정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좋은 스승을 만났었다는 것에 감사했고요. 살면서 저도 타인에게 그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데...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창밖을 보니 집에 아주 조그만 강아지가 한 마리 와 있네요. 아빠가 또 어디서 얻어오셨나 봅니다. 너무 작고 귀여워서 얼른 만져보러 나가고 싶어 이번 편지는 이만 마칠까 해요. 교수님께 하고 싶었던 말은 다 옮긴 것 같아 별 망설임은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종종 편지 드려 제 안부 전할게요. 뭐, 당분간은 이렇다 할 일 없이 늘 똑같은 생활일 것 같지만요. 줄을 붙여쓴게 교수님 읽으실 때 불편을 드릴 것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 읽으실때 마우스로 한눈에 들어오는 부분만큼을 딱딱 끊어가며 읽으면 줄이 뒤섞이거나 눈이 피로한 게 덜한 것 같아요.

 

무더위에 지지 마시고 늘 건강하세요. 저도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겠습니다. 교수님 뵙고 싶네요.

참고로, '한국현대문학의 이해'의 수업은 여기를 보세요.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를 다룬 내 글은 여기에 있습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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