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란 베풀수록 그 유익이 본인에게 돌아오는 법이다."(조이스 럽, 윤종석 옮김, <<느긋하게 걸어라>>, 복있는사람, 2007,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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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친절하다고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그렇게 판단하는 걸까요? 이익에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배려의 마음씨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설에 이에 대한 그럴 듯한 주장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참된 인간적 친절이 절대적인 순수성과 자유를 지니고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떠한 힘도 갖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뿐이다. 인류의 참된 도덕적 시험, 가장 근본적 시험은(이것은 인간 내면에 그토록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있어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들에게 내맡겨져 있는 것들, 즉 짐승들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서 나타난다.(밀란 쿤데라, 송동준 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세계의 문학>> 49호, 1988 가을, 532쪽)
새겨 들을 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대체로 경쟁과 이익을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요. 예를 들어 짐승이나 자연처럼 친절을 베푸는 대상이 아무런 힘이 없을수록 그 친절이 순수해지고 따라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친절해서 얻을 이익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무상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합니다. 먼저, 좋은 일을 했다는 만족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마 일차적으로 친절을 베풀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나도 나쁘지 않은 인간이라는 일종의 자족감에서 오는 것일지 모릅니다. 더 나가면 은근히 남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쁘게 보자면 인간은 이렇게 얄팍한 존재라는 말도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경계하여 한 손이 한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얄팍한 면이 있다고 하여도 친절을 베푸는 일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쿤데라가 말하는 참다운 친절에는 더 적극적인 뜻도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전에도 그랬습니다만 특히 요즘은 공부를 가지고 아이들을 학대하는 때라 놀면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꾸중을 합니다. 놀이는 얼른 보아 이익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 그야말로 쓸모라곤 없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가 좋아서 즐겁게 하는 게 놀이니까요. 그렇지만 잘 놀아야 마음과 몸이 두루 건강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이런 점에 대해서는 <놀이>를 보세요). 이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좋아서 베푸는 친절은 궁극적으로 내가 행복해지는 데 이바지합니다. 이를테면 자연에 대해 배려하면 그만큼 자연이 건강해질 테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행복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여러 가지 예를 들 것도 없이 싱싱하게 자라는 나무는 우리를 편안하게 합니다.
힘없는 것을 다 사랑하는데 무슨 말을 이렇게 하느냐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애완동물이나 난초 같은 식물을 키우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힘없는 것 자체에 대한 연민이라기보다는 자기 것이니까 그런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래서 내 편견이기를 바라고 또 그럴 테지만 내게는 애완동물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그만한 정성을 내 것이 아닌 것에다가도 쏟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탈민족주의를 얘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전에는 힘이 없는 나라의 민족주의는 저항 민족주의라고 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민족주의 자체에 자기 민족 중심주의라는 것이 존재해서 같은 민족 구성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행태를 보인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특히 우리의 경우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습니다.
'붉은 악마'의 일방적인 응원도 내게는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중략) 이제 응원이나 관전은 "자국 팀의 승리에 대한 즐김이 아니라 경기 자체에 대한 즐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속 좁게 자기 나라 축구팀만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너무 슬픈 일입니다. 여기서도 다양성을 무시하는 획일주의의 벌거벗은 모습을 봅니다. 혹시 초대형 태극기가 젊은이들의 개성적인 얼굴과 생각을 가려 버린 것은 아닐까요?(전문)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푸대접이나 학대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듣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동포인 조선족에게도 고통을 준다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심상하게 되었을 정도입니다. 물론 강대국 그 가운데서 특히 미국의 횡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작금의 이라크 공격이나 북핵 문제에 대한 일방적 태도를 생각하면 민족주의가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통일이라는 민족의 대과제를 해결해야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를 벗어나야 하느냐보다는 내부적으로는 민족 구성원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면서 밖으로는 민족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아울러서 다른 민족의 그것도 공평하게 인정해 주는 열린 자세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다시 내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이 세계화 시대에 우리를 내세우면서 남과 우리를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한마디로 촌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 세계일 것입니다.(전문)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순수한 친절과 이익을 얻기 위하여 행하는 비인간적 행위 사이에는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가요! 아무튼 우리로 말미암아 불행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참다운 행복을 얘기하는 것은 낯뜨거운 행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점차로 황폐해져 가는 자연에 대해서도 꼭 마찬가지의 얘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숲이 사라져 가는데 편리해지고 물질적으로 잘산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따져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올리고 나서 <<한겨레>>를 봤더니 취임사에 환경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실망스럽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공감하는 바가 있어 여기에 그 일부를 옮겼습니다.
환경의 문제는 이렇게 사회가 존속 가능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될 만큼 절박하다는 외침이 여러 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리에서 행복을 거론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2003)그런데, 궁금하다. 노 대통령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걸 아시는지 요즘 유행어가 되다시피한 이 말을 모를리야 없겠지만, 진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는 듯해서다. 취임사에서도, 중요 국정과제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은 찾아 보지 못했다. 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 정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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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발전’은 환경 지상주의가 아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한 뒤에나 생각할 배부른 요구도 아니다. ‘경제 발전’ ‘사회 발전’ ‘환경 보전’이 함께 가지 않으면, 그 사회는 지속, 아니 지탱이 가능하지 않다는 절박한 경고다.
세계경제포럼이 지난해 발표한 환경 지속성지수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142개 나라 가운데 136위를 차지했다. 우리보다 뒤진 나라는 아이티·이라크·북한 등 여섯 나라 뿐이었다. 환경 지속성지수란 한 나라가 환경파괴를 유발하지 않고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다. 우리의 개발과 성장이 얼마나 혹독하게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지 이 지표는 단적으로 말해준다.(지영선, <대통령 취임사에서 빠진 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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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좋다는 내 두루뭉술한 생각과는 달리 사람의 행동에는 다 불순한 의도가 있으므로 친절하거나 불친절한 것에 대해서 일희일비할 것 없다는 관점도 있을 수 있다. 아래 인용하는 김형경의 주장이 그 예다.
우리 마음에 대한 냉철한 리얼리즘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진술을 만나면, 프로이트의 스승이 한 말투를 빌려서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할 수 있나"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심정이 된다.타인에게 과잉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사기치는 사람. 심리적으로 더 문제가 되는 사람은 후자이다. 그런 이들은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받고 싶은 보호와 관심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올 호의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호의를 베풀어놓고 상대가 그것에 대해 보답하는지를 지켜보는 무서운 속성이 있다고 한다. 오른손이 한 일에 대해 왼손이 보답받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중략)
인간은 본질적으로 늘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행위에도 당사자의 욕망이 배제된 행위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랑이나 헌신도, 친절이나 호의조차도. 내가 타인에게 베풀었던 친절의 본질을 알게 되자 타인의 친절에 대해 특별히 감동하지도, 불친절에 대해서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 마음이 조금 더 잘 보이니 세상이 조금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 재미삼아 해 본 생각이지만, 이제 나는 사기당하기 쉬운 사람의 특성을 가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이들은 우선 세상이 따뜻하고 온정이 넘치는 곳이라는 유아적 환상을 토대로 한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한 모든 호의에는 보답을 요구하는 무서운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한 채, 자신이 그런 호의나 친절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누군가 전능하고 힘있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의존성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요소는 사기당하는 사람의 필요충분조건이며, 동시에 내게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늘 세상살이에 미숙하고 위태롭다고 느꼈던 미진함의 본질도 그것이었다. 순수하고 사심없이 살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세상과 인간에 대해 더 냉철하고 음험한 수준까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세상과 인간의 속성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순수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은 타인으로 하여금 사기치고 싶은 욕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김형경, <<사람 풍경>>, 아침바다, 2004, 250-3쪽)
꿈의 해석의 결론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쁜 아주 부도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나는 젊었을 때 나의 은사 샤르코 선생이 이와 같은 경우에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현실에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한다면, 겸허한 태도로 자기의 동정심이나 반감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프로이트, 김성태 역, <<정신분석 입문>>, 삼성출판사, 1990, 157-8쪽)김형경의, 저런 주장이 맞다고 하여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환상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얼리즘과 낭만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두 개의 보조적인 관점이라 생각하는 것이 옳다. 측은지심 같은 것이 설사 환상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하여도 이런 마음 때문에 세상이 밝아지게 되고 다른 사람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