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연기

귤밭1 2004. 12. 27. 08:56

 

나는 해병이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바로 이맘때쯤에 훈련 받던 광경이 생각나 이 글을 적게 됐습니다.

제대할 때는 지긋지긋해서 포항 쪽으로 향해서는 오줌도 안 누겠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가져다 준 여유일까요? 대체로 나이가 들면 결기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듣기 좋게 달관이라고 하는데 경계하여 들어야 합니다. 물론 반대로 쓸데없는 고집쟁이가 되는 수가 많다는 것을 신문 같은 데서 보기도 합니다만. 개혁에 반대하고 나서는 자칭 국가 원로라는 사람들을 보세요. 사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고자 나선 고집쟁이 늙은이들이지요.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와서 해병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이비에스(IBS) 훈련입니다. 큰 고무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서 육지로 상륙하는 훈련입니다. 민간인들이 해병대 가서 훈련 받는 모습을 보여 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은 데서 곧잘 보는 것으로 보트를 몇 사람이 이고 나르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물론 이것도 그 훈련의 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주 쉬운 시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그냥 해 보는 맛보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바다로 나가 출발하여 점심 때쯤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 그 전체인데 그 과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까요.

이제 숙달된 조교의 시범에 따라 훈련으로 들어가 볼까요? 겨울에 바다에서 받는 것이라 춥다고 생각하실 이도 있겠는데 여기서는 뭘 한참 모르는 소리라고만 해 두겠습니다. 병사들이 보트의 좌우에 일렬로 앉는데 한 다리는 바닷물이 부딪는 보트의 불룩한 부분 위에 구부리고 한 쪽은 안 쪽으로 좀 자유롭게 위치시킵니다. 그런데 졸병은 앞에 앉힙니다. 바다에 빠진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여서 노를 저어야 보트가 나가니까요. 그러니 고참은 뒤에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씩 앞에 앉은 졸병이 노를 잘못 저어 바닷물을 튀길 때 모를 세운 노로 무지막지하게 졸병의 머리를 내리치거나 여러 번 되풀이하면 발로 차서 바다로 빠뜨리는 일은 하지요. 이래야 허리가 빠질 것 같은 아픔도 졸병의 슬픔도 잠시 동안이나마 다 잊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求? 그만큼 절박하니까요. 이러면서 비인간적인 대우도 어느덧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것이지요. 군대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 가운데 하나로서 이 폭력의 내면화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어쨌든 점심 먹으러, 출발한 곳과 많이 떨어진 곳에 오릅니다. 이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아세요? 여러 말 할 것 없이 머리가 텅 비어 버립니다. 그런데 양지쪽에 앉아 있으면 몇 채 되지 않는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보입니다. 바로 집과 나무들과 호수들을 살리는 브레히트의 연기입니다.


연기

호숫가 나무들 사이에 조그만 집 한 채.
그 지붕에서 연기가 피어 오른다.
이 연기가 없다면
집과 나무들과 호수가
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1953)
(브레히트, 김광규 옮김,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1999, 138쪽)
브레히트는 아마 이런 식으로 자기의 연기가 사용될 줄은 몰랐을 것 같습니다. 연기가 인도하는 상상력을 따라 우선 어머니가 해 준 따뜻한 밥(민가에서 먹는 맛있는 밥을 군대에서는 사제(私製)밥이라고 했답니다. 처음에 외출했을 때 먹어 본 그 사제밥의 기름이 잘잘 흐르는 꿀맛은 군대 갔다온 사람이라면 아무도 잊지 못할 거예요.)을 마음껏 먹고 그 다음에는 아무 꿈도 없는 편한 잠을 오래오래 아랫목에서 자고 싶은 생각에 목이 메이곤 했더랍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서 했던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네요. 머리가 비어 버렸다는 게 맞나 봅니다.

사실은 이 연기와 목메임을 여러분께 들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훈련 이야기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실감을 주기 위한 보조 자료에 지나지 않습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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