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왜 '모습'이란 말을 많이 쓸까?

귤밭1 2007. 12. 27. 22:36

요즘 교육대학원생이 제출한 논문을 읽느라 정신이 없다. 현대문학 분야 논문 제출자 18명 가운데 내가 지도해야 할 학생이 16명이다(이렇게 학생이 많이 몰린 것은 전적으로 현대소설 분야의 논문이 다른 영역보다 비교적 쉽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읽으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문장까지 손봐 줘야 한다. 이렇게 바쁜데 감기까지 걸려 놨으니 그야말로 악전고투다.

 

요즘 내 흔적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래도 몇 사람은 궁금해할지도 모르니 내가 잘 있다-고생하면서-는 인사도 하고 좀 유용한 얘기도 하고 싶어서 엄살로 시작했다.

 

어떤 학생의 글을 보다가 그 학생뿐만 아니라 다 같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어서 여기 옮긴다.

조화처럼 향기도 생명력도 없는 대상을 단지 모양만을 보고서 찾은 뱀의 모습, 그것은 인위적 세계가 본질적인 세계인 줄 착각하고 살아온 인간의 모습이며 경선과 이화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조화 사이에는 뱀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적 질서의 화려함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곧,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뱀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한없이 되풀이되는 '모습'이 민망한 모습-나도 한번 써 보자-을 연출하고 있다. '모습'을 빼도 이해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렇다. 그냥  "도시적 질서의 화려함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뱀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 된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도 이 군말을 애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아래 옮기는 것은 각각 다른 학생의 글이다.

1) 원생들의 침묵 속에는 이러한 뜻이 숨겨져 있지만, 조원장은 그런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 모습을 보인다. (* '속'이라는 말도 잘 쓴다. 이를테면 '소설 속의 인물'이라는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냥 '침묵에는', '소설의 인물'이라고 해도 되는데 말이다. (덧붙임) 이 글을 쓰고 나서 '차량 안에는 사장이 타고 있었다'는 문장을 만났다. 차는 안에 타지 밖에 타지 않는데! '차에는 사장이 타고 있었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2) 일확천금을 쫓아 금광에 미쳤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만주로 떠나버리는 큰아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김만장 집안의 도덕적 타락과 경제적 무기력함은 봉건적 질서의 몰락이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부패한 모습은 설화적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중략)
주인들은 곰녀가 장사를 제대로 못하자 집안일을 시켜서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태도는 아이를 낳고도 빼앗겨 버리는 홍도의 모습을 통해 극단적으로 제시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태도'는 '모습'의 다른 말이다!)

왜 이런 사태가 여러 학생에게 일어날까? 첫째는 용언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1)에서 '모습'을 빼고 "원생들의 침묵에는 이러한 뜻이 숨겨져 있지만, 조원장은 그런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거나 "원생들의 침묵에는 이러한 뜻이 숨겨져 있지만, 조원장은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로 고치면 아주 자연스럽다.

 

둘째 징후가 의미심장한데 내게는 문화사적인 맥락이 작용한 것으로 읽힌다. 시각 매체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시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그런 징후를 저 예문들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2)에서 '큰아들의 모습'은 '큰아들의 무책임' 과 같은 추상적인 설명이 더 좋은데 '모습'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둘째의 '부패한 모습'도 '부패'라고 해도 되는데 강박적으로 시각화하려는 무의식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학생이 아니라 시대 탓을 해야 하는 건가?

 

아이구, 논문 읽어야 하는데 너무 많이 해찰을 부렸다. 여러분, 안녕!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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