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오대산 길 걷기(2009. 8. 14-15)

귤밭1 2009. 9. 2. 21:01

오늘(2009. 8. 14) 오대산 길, 그러니까 상원사에서 시작해서 홍천군 내면 분소(목맥동)까지 17킬로미터를 걸었다. 원래는 도로지만 이제는 차를 다니지 못하게 해서 자연에 가까운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꿈길을 걷는 것만 같다. 지난번에 상원사에서 걷기 시작했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중간에서 그만두고 돌아오고 말았는데(여기 보세요) 끝까지 보지도 않은 채 다 걸은 셈 쳤다가는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그렇게 길이 마음에 꼭 들었다. 지난번에 미처 걷지 못했던 길은 아름다운 길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케 해 주는 그런 곳이었다.

 

5시에 잠을 깨 세수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과일 챙기고 밥에다 김치, 김을 도시락에 싸서 집을 나섰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진부까지 가는 첫 차가 6시 32분에 있다. 지하철에 탔는데 너무 일찍 나왔는지 한참 기다려서 5시 40분쯤에 출발했다. 첫 차는 역마다 세워 뒀다가 출발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것 큰일이다. 조금 가니 똥이 마렵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보는 습관이 있는데 바쁘게 나오는 바람에 넘겨 버리고 말았다. 참느라고 힘을 주는데 도무지 내리는 데까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중간에서 허둥지둥 내려서 화장실을 찾아 바지를 내리자마자 쏟아진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운이 좋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게 무릇 기하인가! 아마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한 일이 있을 테니 내 말을 잘 이해할 것이다. 유비무환이란 걸 명심하기로 한다.

 

뒷처리를 제대로 했는지 자신이 안 서는 채로 화장실을 나오자 다시 기차를 타러 뛰어갔다. 어느덧 6시가 넘어 버렸다. 아무리 늦어도 6시 25분까지는 강변역에 도착해야 표를 끊고 간신히 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차는 내 마음에 맞춰 오지 않는다. 시간표를 봤더니 5시 52분에 지나갔고 다음 차는 6시 4분에야 온다. 역에서 내려서 맞은 편에 있는 터미널로 교통신호 무시하고 뛰어가면 시간에 맞게 도착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오늘 따라 왜 기차가 이리 천천히 가는지 모르겠다. 역에 내려서 멈추라는 신호를 못 본 척하고 길을 건너 터미널로 뛰어갔다. 기다리는 사람이 길을 가득하게 메웠는데 나라는 인간은 참 한심하다. 아침 일찍이라 다들 나처럼 바쁠 것이다. 사람들이 내 뒤를 따랐는지는 모르겠다. 뒤를 돌아다볼 틈도 없었다.

 

아침이라 차는 잘 달린다. 예정대로 8시 40분에 진부에 도착했더니 상원사로 가는 버스는 10분 전에 떠났단다. 다음 차는 한시간 10분 기다려야 한다. 왜 시간표를 이리 짰을까? 서울에서 오는 차 맞춰서 8시 40분이나 45분에 출발하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표를 짜는 곳에다 얘길 해 봐야겠다. 그런데 서울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서울에서 오는 버스 시간에 맞춰서 차를 배정한다고 하여도 요즘은 다 차를 몰고다니는데 과연 몇 사람이나 저 버스를 탈까? 이런 생각이 뒤를 이어서 맥이 빠졌다.

 

시간이 있으니 아침을 먹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차를 탔다. 10시 20분 좀 넘어서 상원사에 도착해서 걷기 시작했다. 배낭에 이것저것 담아서 그런지 좀 무거운 느낌이다. 조금 걷자 구슬땀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선선하니 기분이 좋다. 이런 기분은 내내 그랬다. 땡볕인 데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서늘한 기운을 느끼면서 걸었다. 높은 데다 나무가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비가 온 뒤라 계곡물 소리가 요란한데 내 안의 때를 씻어 내는 듯했다.

 

고요하다. 정적의 세계다. 바람마저 숨을 죽이고 나비와 잠자리와 다람쥐만 움직이는 것 같다. 걷는 사람은 나 혼자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서 소리도 쳐 보고 노래도 부른다. 지난번에 걸었던 곳을 지났다. 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갈수록 길가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을 다 덮는다. 양쪽의 나무들이 악수하자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서늘한 기운이 나를 감싼다. 해가 비치는데도 여름 같지가 않다. 비가 내린 뒤여서일까, 심심치 않게 조그만 폭포들이 눈요기하라고 나타난다. 사진을 찍느라고 바빠서 걸음이 느려질 정도로 길이 아름답다. 사진은 기대해도 좋다. 피시방이라 사진을 못 올려서 미안하다. 좀 내려가자 이제는 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다. 내려가고 있는데도 나는 기분이 좋아 하늘로 날아 올라갈 것만 같다. 흥겨워서, 못하는 노래 여러 곡 불렀다.

 

오대산 길이 끝나는지 관리인인 듯한, 나이 지긋하게 잡순 인자한 아저씨가, 오다가 길이 무너진 곳을 봤냐면서 이상이 없느냐고 묻는다. 내려가면 버스 탈 수 있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제 걱정은 다 덜었다. 지도를 보면 오대산 길이 끝나는 내면이 깊은 산골인데 홍천 읍내까지는 꽤 거리가 되기 때문에 저녁에 어떻게 해야 할지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모든 게 해결된 듯해서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난 요즘 친구들에게 농담을 섞어서 일흔살쯤 되면 주위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산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그런데 그 놈들이 더 살아야 한다며 내 제안을 무시하여 기가 꺾이고 있었는데 관리인인 듯한 아저씨를 보자 막연하게 얘기했던 산 속의 삶이 구체적으로 떠올라 기뻤다. 바로 저런 일을 하면 된다!

 

딱 5시간 동안 걸어 비포장 도로를 다 걸었다. 내면 분소가 있는 목맥동에 도착하니 3시 30분이다. 버스는 5시에 있단다. 계곡으로 내려가 한눈 붙일까 하다가 차 지나가면 세워서 타기로 하고 아스팔트 길을 걷는다. 길에 차가 그리 많지 않아서 걸을 만은 한데 땡볕이라 숨이 차다. 슬슬 지친 기색을 보이는 몸이 불쌍해진다. 꽤 걸어서 5시가 지나는데도 차는 오는 기색이 없다. 해가 지면 택시를 부르든지 민박하든지 아니면 지나가는 차를 세워서 얻어 타기로 하고 계속 걷는다.

 

5시 반이 지나서야 버스를 만났다. 더 가지 않고 앉아서 돌아오는 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차를 타서 기사에게 물었더니 홍천으로 나가는 막차는 6시에 이미 떠났고 내가 탄 버스는 내면 사무소가 있는 창촌리까지만 간다고 했다. 친절한 기사가 하나 있는 숙소와 음식점을 소개해 준다.

 

내일은 오늘 온 길을 되밟아서 상원사로 가기로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정통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되풀이해서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여러 번 봤는데도 왜 그때마다 처음 보는 것만 같았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신기하다. 이 길도 마찬가지다. 또 걸어도 새로울 것이다. 이제 걸리는 시간은 알았으니 여유를 부리며 물에서 좀 놀기도 해야겠다. 기분이 내키면 살색 팬티 입고 물에 뛰어들기도 해야지. 오늘 잠시 발을 식히려 물에 담갔더니 얼음같이 차서 오래 견디지 못하기는 했지만. 밥이 걱정인데 이 글을 쓰고 나서 아침에 도시락 싸 줄 수 없느냐고 식당 아줌마에게 부탁해 봐야겠다. 과일도 좀 사고.

 

길이 짧아서 그렇기는 하지만 하루만 걷는 데는 이 오대산 길이 어느 길 못지않게 멋지다. 전체적으로야 제주 올레 길이 단연 최고지만 같은 거리만 비교하면 오대산 길도 올레 길에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올레 길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 굳이 1등, 2등 가려서 뭐해. 서로 다른 길인데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 최고를 뽑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내일 다시 저 길을 걸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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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09. 8. 15)은 어제의 길을 되밟아서 오대산 국립공원 내면 분소에서 시작하여 상원사 거쳐서 월정사까지 걸었어요. 7시간 걸렸어요.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처음에는 춥기까지 했습니다. 피서는 역시 산골로 와야겠습니다. 밤에 자는데 아침녘에는 이불을 덮어야 했습니다. 아침 햇빛이 나무 잎을 통과해서 내는 빛줄기는 영화의 장면 같아서 황홀했습니다. 이 사진 보세요. 역광이어서 사진이 제대로 나올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알아볼 수 있는 정도는 되네요. 저 장면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좋은 사진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같은 길이니까 소감은 어제의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하나만 얘기하고 마칠게요. 어제는 걷는 내내 가슴이 휑하니 비어져 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 누가 옆에서 발동을 걸기만 하면 막 울음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어요. 마음이 순수해져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순수해지려고 그랬을까요? 울음도 안에 있는 걸 쏟아내는 거니까 마음을 비워 내는 일이잖아요. 아무튼 노래를 부르는데 목이 막 메이더라고요.

 

이제 오대산 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찾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강원도 쪽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내면 분소에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는 두 시간 여의 길은 천국이 따로 없게 아름답고 호젓합니다. 홍천에서 내면 창촌리를 지나는 버스를 타서 창촌리에서 내려 다시 오대산 국립공원 내면 분소(목맥동)로 오가는 차로 갈아타면 됩니다. 창촌리에서 내면 분소까지는 강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곳곳에 민박집이나 펜션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창촌리에서 상원사까지 걸어 볼까 해요.

 

자, 사진입니다.

 

2009. 8. 14(상원사에서 내면 분소까지) 사진 1(지도),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사진 8, 사진 9,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 사진 13, 사진 14, 사진 15, 사진 16, 사진 17, 사진 18, 사진 19, 사진 20, 사진 21, 사진 22, 사진 23, 사진 24, 사진 25, 사진 26, 사진 27, 사진 28, 사진 29, 사진 30, 사진 31(지도), 사진 32(차량 출입 통제 안내판)

 

8. 15(내면 분소에서 상원사 거쳐 월정사까지)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사진 8, 사진 9,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 사진 13, 사진 14, 사진 15, 사진 16, 사진 17, 사진 18, 사진 19, 사진 20, 사진 21, 사진 22, 사진 23, 사진 24, 사진 25, 사진 26, 사진 27, 사진 28, 사진 29, 사진 30, 사진 31, 사진 32, 사진 33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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