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8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사흘 동안 강원도를 돌아다녔다. 영화를 안 봐서 그 내용을 모르는 채로 제목만 빌려서 멋을 부려 말하면, '강원도의 힘'을 실감한 여행이었다. 맑은 계곡물과 그 소리, 푸른 나무의 바다로 이뤄진 산이 선물해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렸다.
첫날은 인제에서 현리라는 데까지 내린천을 따라 올라갔다. 차가 좀 다니기는 했지만 피서철이 끝물이어선지 그리 많지는 않아서 걸을 만했다. 그동안은 숲길을 편하게 걸어다닌 셈인데 오랜만에 땡볕을 맞으며 일반국도를 걷는 맛이 괜찮았다. 처음으로 도보 여행을 시작하여 안산에서 목포까지 걷던 때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는 왜 걷는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걷는 게 좋아서로 그 이유가 단순해져 버렸다. 왜 사는지를 따지지 않는 것과 같다.
서울에서 게으름을 피워서 12시쯤에 인제에 도착한지라 5시 30분까지 25킬로미터를 걸었다. 숙박지나 버스 시간 등 정보를 모르니까 초조해져서 현리를 3킬로미터 정도 남겨 놓고, 인제로 돌아가는 버스가 보이자 타고 말았다. 이런 것도 큰 변화라면 변화인데 이제는 걷기 전에 별로 준비를 하지 않는다. 떠나는 날 아침에 지도나 챙기는 정도다. 경험으로 보아 버스가 곳곳마다 다니니까 길에서 밤을 새울 염려는 없겠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후가 되면 내가 도착하는 곳에 숙소가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편하게 이런 게 여행의 맛이라고 눙치곤 한다.
숙소를 정하자 오랜만에 열심히 걸어서 지치다. 피시방에 들러서 여행기 올려야 할 텐데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그대로 드러누웠다가 한숨 자고 나서 몸을 씻고 다시 자 버렸다.
다음 날 아침 6시 45분에 현리로 가는 차를 탔다. 어제 내가 걸은 내린천을 따라가는 차는 8시에 있는데 내가 탄 차는 목적지로 바로 가지 않고 빙빙 돌아간단다. 출발할 때는 나 혼잔데 현리에 가까워질수록 학생들로 가득찬다. 아침 일찍인 데다 산골이라 추워서 아이들은 교복 위에다 겉옷을 껴 입었다. 이제 가을인가 보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이 길도 걸어 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8시에 현리에 도착하고 봤더니 잠 잘 곳도, 피시방도 다 있다. 어제 이곳에서 묵었더라면 아침 일찍부터 걸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준비를 제대로 안 해서 차를 타는 데다 쓸데없이 시간을 들이고 말았다. 오늘 목적지인 홍천군 내면 창촌리까지 가려면 늦어도 6시쯤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시간이 늦어서 거리를 줄이자면 상남이라는 데까지 차를 타고 가야 할 것 같았다. 8시 10분에 상남으로 가는 차를 타고 내려서 아침으로 된장찌개를 먹었다. 반찬으로 나온 곰취 장아찌(사진)가 맛있다. 산나물의 향기가 오래 입안에 맴돌았다.
9시부터 걷기 시작했다. 33킬로미터쯤 되는데 25킬로미터까지는 446번 지방도다. 여기서 도움말 한 가지. 세자리 숫자로 표시되는 지방도를 선택하면 좋은 길이 될 확률이 높다. 차가 잘 다니지 않아서 그만큼 자연에 가까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내린천 상류 쪽으로 가는 길이어서 들리는 건 맑은 물소리뿐이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걸음도 마음에 든다. 앞에서 강원도 힘이라고 했는데 쭉쭉 위로 뻗은, 웬만한 미인은 저리 가라 할 금강소나무도 마땅히 이 힘의 하나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기품 있게 자라는 소나무는 가볍게 하늘로 날아 올라갈 것만 같은 자태를 뽐낸다. 목적지가 지난번에 들러서 묵었던 곳이라 한결 느긋하다. 미산계곡에 들어가 찬물에 얼굴도 씻고 발도 담그는 여유도 부려 본다. 1킬로미터마다 알려 주는 이정표의 거리를 줄이는 맛을 어디다 비교해야 할까? 오로지 느림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4시 반에 창촌리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상원사에서 오대산 길을 지나 묵었던 곳이라 정답다. 숙소를 정하고 겉옷을 빨고 난 다음 저녁으로 순대국밥을 맛있게 먹고 여행기를 올리려고 피시방에 들렀는데 지쳐서 금방 나오고 말았다. 내일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내일 아침 마음이 가는 대로 정하기로 하고 잠을 청하기 전에 오랜만에 생긴 물집을 터뜨렸다. 제대로 걸은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다.
셋째 날은 5시 반에 출발했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날씨 예보에 오전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는 맑겠다고 했으므로 그리 걱정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산속에서 비를 맞으면 곤란하겠으므로-처음에 오대산 길을 걸을 때 비가 와 돌아온 적이 있는데 천둥까지 쳐서 무서웠다- 오대산 길의 비경은 다음에 즐기기로 하고 오늘은 차도를 따라 가기로 즉석에서 결정했다. 목적지는 장평인데 북쪽으로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봉평, 아랫쪽으로는 평창, 서로는 진부로 이어지는 곳이다. 37킬로미터쯤 된다. 쉬지 않고 9시간 남짓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곧 비는 그쳤는데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꼈다. 걷기에는 가장 알맞은 날씨다. 모자를 안 쓰고 걸으니까 한결 시원하다. 일반국도인데도 차가 거의 안 다니는 것도 마음에 든다. 이 길의 백미는 운두령(雲頭嶺)이다. 제일 높은 데는 해발 1089미터가 되는데 굽이굽이 고갯길이 이어지는데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정상에서 맞은 선선한 바람은 신선이 따로 없다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고개 이름 그대로 구름을 탄 것 같았다. 3시 조금 못 돼서 장평에 도착했는데 바로 서울 가는 버스가 있다.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강원도의 길은 참 좋다. 대체로 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고 주위가 다 푸르디푸른 산이다. 제발 이곳만은 개발의 광풍에 불리지 말고 강원도의 힘을 살리는 쪽으로 나갔으면 한다. 앞으로 많이 돌아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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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8월 29일: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사진 8, 사진 9,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 사진 13, 사진 14, 사진 15, 사진 16, 사진 17, 사진 18, 사진 19 8월 30일: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사진 8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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