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한비야의 글쓰기 비결

귤밭1 2009. 9. 9. 21:23

한비야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그의 최근 산문집인 <<그건 사랑이었네>>(푸른숲, 2009)의 구절을 빌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무모하리만치 크고 높은 꿈 그리고 거기에 온몸을 던져 불사르는 뜨거운 열정"(152쪽)의 사람이라고 설명해 드리겠다(여기를 보세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생긴다면 그의 책을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느끼는 아주 소중하고 즐거운 독서 시간이 될 것이다.

 

알라딘에 들어가 보니 그의 책은, 2009년 9월 6일 현재, 최근 18개월 이내 나온 책들 가운데 판매 순위가 2위와 큰 차이가 나는 1위를 차지하고 있다(여기를 보세요).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꿈과 열정을 가득 담고 있는 내용이 주는 감동을 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잘 읽히는 문체의 힘도 거들고 있다. 책을 들면 한꺼번에 다 읽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술술 잘 넘어가니까 글도 쉽게 쓸 것이라고 짐작하기 쉬운데 그의 말을 따르면 밤을 새워 가며 몸부림친 결과이다. 좋은 것치고 그냥 나오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우연도 성의를 편드는 법이다.

 

마침 이 책에 <내 글쓰기의 비밀>이라는 글이 있어 그 내용을 소개할까 한다. 좋은 글은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우리 집 식구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런데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는 말았으면 한다. 좋은 글을 쓰는 구체적인 방법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짤막한 글에서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도둑의 심보다. 글을 잘 쓰는 구체적인 방법을 익히자면 글쓰기를 다룬 책을 볼 뿐만 아니라 이것에 맞춰 직접 글을 써야 한다. 여기서는 글을 쓰는 데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얘기하고 있는데 귀담아듣고 실천하면 틀림없이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자, 내 성장의 가능성을 굳게 믿으면서, 한비야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들어 보기로 하자.

우선 좋은 글을 향한 기본적인 몸부림은 다들 알고 있는 다독, 다작, 다상량이다.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중략) 이 '삼다'와 더불어 나는 다록(多錄)을 추가하고 싶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잘 기록해놓는 일 말이다. 나는 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중략) 기억은 지나고 나면 사건의 골자, 즉 뼈대만 남기지만 기록은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는다.(111쪽)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는 '삼다'야 글쓴이가 말한 대로 기본 중의 기본이어서 더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기록해 두는 일의 중요성은 의외로 소홀히 여기기 쉽다. 요즘에는 사진기가 일반화되어서 더 그렇다. 그런데 기억을 도와주는 도구가 많고 발전할수록 잘 잊기 쉽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손전화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으니까 이제는 가족의 번호도 확인해야 알게끔 되어 버렸다. 아마 나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은 기억 자체가 망각이기도 하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겨 놓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과거를 멋대로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기록해 놓아야 한다. 몇 해 전의 여행을 떠올려 보자. 기록해 놓지 않으면 어느 나라에 간 것만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고 구체적인 대목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을 알게 된다. 기억을 믿지 않는 데서 글쓰기는 시작된다.
두 번째 몸부림은 몰두다. 내 글이 술술 읽히니까 쓸 때도 일필휘지로 쓰는 줄 안다. 아니다. (중략) 날밤을 새우고 또 새운다. 밤을 새워서 좋은 글이 나온다면 한 달이라도 새우겠다. 밤을 새울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대체 이렇게밖에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쓴다고 나섰느냐며 자학까지 한다. (중략) 그러니 백 퍼센트 몰두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소위 총동원령이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내가 가진 경험과 에너지와 시간을 글에만 몰아주어야 한다. 힘도 없는 주제에 어찌 감히 있는 힘과 시간을 아낀단 말인가? 그래서 원고 마감 전날에는 어김없이 밤을 새운다. (중략) 소파에서 토끼잠을 자다가 주기적으로 벌떡 일어나 써놓은 글을 다시 읽어보고는 고치고 또 고친다. 신문이든 잡지든 어딘가에서 내 글을 보았다면 아, 이 사람, 이 글 쓰느라 전날 밤 밤 새웠겠군, 생각하면 '백 프로'다.(113-4쪽)

글쓰기에는 이력이 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전문가인데도 이렇게 글마다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어떤가? 글 못 쓴다고 엄살 피우기 전에 원고지를 붙들고 밤을 새워 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저런 말을 들으면 글은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글에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는데 다른 일에도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게 글은 사람의 됨됨이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글이 사람을 만든다. 옛날에 글을 쓰게 하여 관리를 뽑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도 글쓰기를 교양필수로 정한 대학이 많은데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실용적인 측면과 함께 글쓰기가 인간의 형성에 이바지한다는 점을 고려한 데서 나온 결과이다. 초중등 학교에서도 어느 과목보다 글쓰기를 중시해야 마땅하다. 아니, 모든 과목을 글쓰기 위주로 짜야 한다. 프랑스에는 우리 '국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가 없다고 한다. 모든 과목이 글쓰기를 중심에 놓고 있으니까 굳이 국어를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몸부림은 글 쓰기 전에 먼저 말로 해보기다. (중략) 일단 글을 쓴 후에는 전문을 큰 소리로 읽고 또 읽는다. 글이란 결국 운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문장 안에 고저와 장단이 있어야 자연스럽고 전달이 잘 된다. 소리 내서 읽으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나서 껄끄럽거나 어색한 부분을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문장뿐 아니라 내용 점검도 말로 풀어서 하면 훨씬 쉽다. 혼자 읽으며 다듬는 것이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되면 그 다음 순서는 시도 때도 없이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다 쓴 글을 읽어준다. 읽은 후 "어때?"라고 물을 때 바로 "좋은데"라고 하면 난리가 난다.(114-5쪽)
난 이렇게까지 하지 못했는데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특히 친구에게 내 글을 들려주는 것은 내 생각을 객관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야 좋은 글이 된다. 그래서 글이 되든 안 되든 쓰고 나면 발표해야 한다. 채 완성이 안 된 글도 좋다. 시작이 반이라고 손을 대면 끝은 나게 되어 있다. 요즘에야 올릴 데가 얼마나 많은가. 물론 '훈이네 집'도 그 하나다.
네 번째 몸부림은 마감 시간 딱 맞추기와 퇴고다. 나는 마감 시간 직전까지 글을 쓰거나 고친다. (중략) 단행본을 낼 때는 더욱 그렇다. 초교지, 재교지는 물론 인쇄 직전의 오케이 교정지에도 붉은 펜으로 수없이 고쳐서 딸기밭을 만들어 놓는다. (중략) 그것도 모자라 인쇄기가 돌아가기 직전 인쇄소에 가서 고친 적이 있고, 이미 나온 책을 20쇄가 넘도록 고치다가 편집자에게 사실이 틀렸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손대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쓴 적이 있다.(115-6쪽)

정말이지 한비야는 성의와 정열의 사람이다. 저렇게 해서 책이 안 팔리더라도 스스로에게는 뿌듯할 것이다. 남이 알아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으면 나는 이게 최고의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죽으면서 '나는 성의를 다했다'고 얘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하랴. 한비야는 참 멋있다.

 

퇴고에 대해서는 글쓴이가 하지 않은 말을 좀 보태자. 완성된 글을 시간이 날 때마다 손을 보는 것은 기본-끝없이 다듬고 다듬어야 한다. 이 글도 앞으로 몇 번이나 '고치기' 단추를 눌러야 완성(?)될지 모른다-이고 시간이 흘러서 내 글을 남의 글 보듯 할 수 있을 때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글도, 자기 체험이나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글쓴이에게는 잘 들어오지만 내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은 오로지 글에만 의지해야 하니까 무슨 말인지 모를 수가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내 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겨 내 글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상처를 입으면 처음에는 오로지 내 것만 보여서 다른 사람도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을 혼자 짐진 것처럼 아픔을 과장하게 된다. 이 자기 중심주의의 가장 강력한 치료약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내 잘못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 자기반성이 내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데 이 과정에서 어느덧 내 상처는 아물게 된다(여기를 보세요).

 

이제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한비야가 생각하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들어 보자.

나는 글쓰기는 철공을 갈아서 바늘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지칠 정도로 너무나 더디지만 애를 쓰는 만큼 반드시 좋아진다는 거다. 내 첫 책 '바람의 딸' 시리즈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비교해보라. 내가 보아도 글이 좋아졌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치고, 가족과 친구들을 괴롭히고 기자와 편집자들에게 비굴했던 지난 10년간의 결과다. 앞으로 10년 후면 지금의 철공이 훨씬 더 바늘에 가까운 모습이 될 것을 굳게 믿으며 오늘도 미련하게, 그러나 기꺼이 철공을 갈고 있다.(116쪽)

글은 철공을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일이다. 이 무시무시한 진리에다 무슨 말을 덧붙이랴. 연습이 완벽하게 만든다. 바보가 산을 옮긴다. 사는 것과 글쓰기는 같이간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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