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정답

귤밭1 2009. 11. 3. 08:34
먼저 기사를 읽고 내 얘기를 좀 하자.

예로머 더빗(29·사진)은 21세기의 하멜이다. 유럽 안에서 한국학 연구의 허브 구실을 하는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의 한국학과에 다닌다. 2002년에는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우리나라 말을 배웠으며 2006년부터는 한국외대에서 강의하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서 공부했다. 그의 거울에 비친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대학에서 강의할 때 시험에서 네덜란드 시인의 시를 해석하라는 문제를 낸 적이 있어요. 각자의 느낌과 경험을 반영해 풍부한 해석을 한 학생들한테 모두 좋은 점수를 줬죠. 그랬더니 학생들이 저한테 ‘정답’을 자꾸 물어봤어요. 하나의 정답만을 가르치는 게 한국의 교육 방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기사 전문)
삶에 정답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있을 것도, 없을 것도 같아 아리송하기만 하다. 아마 큰 줄기에서는 정답 비슷한 것이 있을 테지만 각론으로 들어오면 저마다 다르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 이르면 다른 대답들이 나올 것 같다.

따지고 들수록 이렇게 모호해지는데 우리 교육은 한결같이 정답 위주로만 간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여기에 대학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까지 12년 동안 정답을 대는 게 몸에 확고하게 배서 으레 삶에도 정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끔 되었다. 얼른 대학입시를 떠올리면 내 말에 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공부를 잘하면 가야 하는 대학은 물론이고 전공까지 덩달아 정해진다. 취향이나 적성보다 어디까지나 성적이 우선이다. 제 정신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슬픈 일인데도 부모는 물론이고 심지어 당사자까지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쓸데없는 정답만 풀다 보니 자기 생각을 가질 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남의 삶을 천연덕스럽게 산다.

그런데 시험에서 정답이 가능해지자면 사실에 관한 것을 출제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예라는 혐의가 있는 대로 한라산의 높이를 묻는 문제를 예로 들면 좋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푸는 학생들은 그 당연한 결과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기계적으로 외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것을 왜 사람이 해야 할까? 책이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다 나오는 건데 말이다. 기계가 해야 할 일을 사람이 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런 사실을 기초로 하여 한라산의 자연 생태를 보호하는 방법 같은 것을 생각해 보게끔 해야 한다. 이러먼 저마다 대답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험을 제대로 치자면 모든 자료를 마음대로 볼 수 있게 시험 시간을 길게 잡고 개성적인 답을 쓰도록 해야 한다.

저 외국인의, 우리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드는 지적이 더는 안 나오게 하자면 객관식 시험을 없애든지 그 비율을 아주 줄여야 한다. 이른바 주관식이니 서술형이니 하는 시험도 짧은 문장이나 단어로 답할 뿐 그 본질은 몇 개 가운데서 하나 고르는 객관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두 유형 다 오로지 사실을 묻기 때문이다.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한다면 너무 우습다.

4개나 5개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문제는 윤리적으로도 매우 안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제대로 풀지도 않은 채 찍은 게 요행히도 맞아서 점수를 얻게 되는 경험이 누적되면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다라는 못된 생각을 키우게 된다. 우리의 병폐인 결과지상주의의 뿌리는 바로 우리 교육에도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여기를 보세요). 그러므로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바른 교육이 되자면 결국 글쓰기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삶에 정답은 없다. 혹시 있다면 마땅히 각자가 마련해야 한다.

******************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