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36년 전 일

귤밭1 2010. 2. 22. 05:28

어제(2010. 1. 31)는 복사할 것이 있어서 집에서 세 시간 동안 걸어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 갔다. 우리 동네 마포에서 가자면 종로에서 신설동을 거쳐 고려대 앞을 지나가야 한다. 종로와 신설동 사이는 재수하면서 무수히 지나다닌 길이다. 신설동 쪽에 하숙을 정하여 종로에 있는 종로학원에 다녔기 때문이다. 이 추억의 길을 지나자 시골에서 혼자 올라와 하숙을 정하고 학원에 다니는 재수생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손꼽아 헤아려 보니 36년 세월이 흘렀다. 학원에서 시험을 치르는 날에는 시험만 보고 일찍 끝나기 때문에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나는 영화를 보거나 걸어서 하숙집까지 가곤 했다. 아마 한시간쯤 걸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때도 걷기를 즐겼던 것 같다. 일요일에는 하숙집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청계천의 헌책방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때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아마 이 걷기가 재수생활의 외로움과 지겨움을 견디게 하는 데 한몫했을 것도 같다.

 

추억을 떠올리자 하숙집이 있던 골목길로 가서 내가 살던 집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 점심 시간이기도 해서 어느 집인지를 알면 들어가서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뵙고 밥을 얻어 먹든지 사든지 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느 집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주위에 높은 건물이 많이 들어선 데다 그때나 마찬가지로 한옥이 죽 늘어서 있는 터라 이 집도 같고 저 집도 같아 도무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혹시 문패만 달려 있더라도 기억을 더듬을 수 있을 텐데 안 보였다. 문패를 보면, 부모님께 편지로 하숙비를 보내 달라고 하던 때였으므로 편지 겉봉에 쓰던 주인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무튼 오래 살았다는 감회가 들어서 기분이 묘했다. 두 분은 살아 계실까? 아마, 큰아들이 그때 중학생이었으니까 그보다 나이가 든 내 부모와 비교해 보면 살아 계실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모든 게 휙휙 바뀌는 세상, 그것도 서울에서 한옥이 오랫동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에서 생존의 증거를 찾은 느낌이었다.

서울은 내게 타향이지만 오래 살다 보면 정도 드는지 이렇게 추억할 거리도 생긴다. 유행가 가사 그대로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되는 모양이다. 시골 사람에게만 고향의 추억이 있어서 대도시에서 태어난 사람을 불쌍하다고 은근히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닌 걸 어제서야 깨달았다. 하기야 우리 어린 시절이야 서울이나 시골이나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여름이 되면 우리가 냇가에서 헤엄치며 놀았듯이 서울 아이들도 한강에서 그랬을 것도 같다.

도서관에서 일 마치고는 걸어서 돌아갈 시간이 충분한데도 지하철을 타고 말았다. 지쳐서가 아니라 시끄럽게 자동차가 다니는 것이 성가셔서다.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어책을 복사하기도 하고 논문도 읽으려고 정기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들르곤 했는데 남의 일이 돼 버린 지도 어느덧 10년이 다 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 보니 젊은 날의 열정(?)도 점점 멀어져 가는 추억이 된 것 같아 이것도 기분이 묘했다. 앞으로는 운동 삼아 도서관 구경도 하리라 마음먹었다.

훈이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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