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카타르시스 혹은 고통스러운 즐거움

귤밭1 2005. 11. 7. 21:36

제1회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박완서는 소설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재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은 우리가 읽었을 때 끄는 맛, 재미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재미 중엔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어요. 요즘은 확 끄는 오락적인 게 승해서 걱정이에요. 우리가 재미라고 생각한 것 중에는 고통도 있어요. 자신을 돌이켜본다거나 인간에 대해 좀더 깊이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죠. 마음보다 깊은 속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얄팍한 행복에 빠졌던 자기에 대한 혐오도 생기고, 돌이켜보고 하다 보면 궁극에는 반성이라고 할까.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거죠. 그런 의미에서도 저도 제 소설이 많은 독자와 만나길 원하는 거죠.(『중앙일보』, 2001. 9. 13)
역시 일류의 소설가라 문학이 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한마디로 문학은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더 넓고 깊은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좋은 문학 작품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괴롭힌다. 그런데 그 결과로 신기하게도 우리 삶은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이 즐거움을 동반하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제대로 자라게 되는 것 같다. 로맹 롤랑의 말마따나 마음의 영웅들은 다 “불행을 통하여 위대해졌고” “인생이란 고뇌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풍요하고 행복할 수 있다.”(로맹 롤랑, 이휘영 역, 『베에토벤의 생애』, 문예출판사, 1989, 11쪽) 고통이 참다운 인간적 성숙의 뿌리가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역시 일류의 비평가인 유종호의,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대한 언급도 들려 드리는 것이 좋겠다. 먼저 시를 읽고, 비평가의 설명을 들어 보자.

 

고함치며 싸우는 것은 매우 용감하다.
그렇지만 내 아느니, 더욱 날랜 것은,
마음속에서 돌격하는
슬픔의 백마부대(기병대)

이겨도 국민은 보지 못하고
쓰러져도 누구 하나 지켜보지 않는다.
그 죽어가는 눈을, 어느 나라도
애국자의 사랑으로 눈여겨보지 않는다.

우리는 믿는다, 새 깃털로 단장하고
이런 사람들을 위해, 천사들은 행진한다고.
열을 짓고 발걸음을 맞추며
백설의 제복을 걸친 채.
       ―에밀리 디킨슨, <고함치며 싸우는 것은>

나라 위해 고함치며 싸우는 병사들은 그 용감성을 칭송받고 애국자와 국민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렇지만 고독한 마음 싸움은 혼자서 치러내는 무상(無償)한 전투이다. 저잣거리 세상 사람들의 주목이나 관심의 대상은 아니지만 순백의 제복들을 걸친 천사들의 축복을 받으리라고 화자는 믿는다. 산업화의 진척에 따라 공리주의적이고 유물주의적인 가치관이 팽배해갈 때 시인은 인간의 내면성도 인간현실의 중요 구성요소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구원은 내면성을 배제하고 성취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시사한다. (중략) 싸우는 용사들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질없어 보이는 마음 싸움 없이, 다시 말해, 슬픔의 백마부대 없이 세상이 맑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슬픔은 지혜를 가져다 준다. (중략) 깊은 슬픔을 통과하지 않은 삶이 피상적이고 얄팍한 것임은 고전비극 이래 그릇 큰 문학이 되풀이 상기시키는 인간사이다. 원한과 분노와 적의와 축축한 감상주의와 냉소적인 재담의 시가 흔하고 참으로 깊은 슬픔의 시가 드물다는 것은 우리 시대와 사회의 황폐성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유종호, <인지의 충격>, 『현대문학』, 1994. 5, 223-4쪽. 참고로 이 글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단행본(유종호 저, 민음사)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의 정독을 권하고 싶다.)
위의 글에서는 ‘내면성’, ‘깊은 슬픔’이라고 하고 있지만,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고통과 마찬가지의 차원에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글의 논지를 해석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슬픔이 지혜를 가져다 준다! 고통의 결과가 즐거움인 것이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즐거움’ 또는 정현종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고통의 축제’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카타르시스와 같은 것이다.

 

이 카타르시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개념이 문학 이론에서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이다. 그 책의 6장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비극은 (중략)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1977, 57쪽)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카타르시스에 관해서 아르스토텔레스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후대의 학자들은 이 말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그 대강의 내용에 대해서는 유종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를 보기를 권하면서 여기서는 거기에 소개되지 않은 하우저의 주장에다 내 생각을 보태기로 하겠다.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것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제어할 수 없는 위협적인 상황에 다시 부딪혀보고 싶어하며, 거기에 계속해서 직면하고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그것을 지배하고자 한다. 비극과 같이 마음을 우울하게 하거나 심란하게 만드는 예술은 일종의 정신분석 치료에 속한다. 즉,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어려움, 괴로움, 갈등, 위험들을 인정하도록 하며, 그것들의 긴장 관계를 우리 내부에서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고 그 해결에 대한 일체의 환상과 기만을 거부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자유를 얻을 수 있게 한다.(아놀드 하우저, 황지우 역, 『예술사의 철학』, 돌베개, 1983, 81쪽)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객이 비극을 보면서 연민과 공포를 느낀다고 했다. 연민은 그 주인공이 고의로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그야말로 비극적으로 패배하고 마는 것에 대한 동정심에서, 공포는 그 비극적 결과의 냉혹함에 대한 무서운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관객이 비극을 다 보고 나서는 마음을 깨끗이 씻어낸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우저는 바로 이런 상태를 정신적 자유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카타르시스이다. 그러니까 이 카타르시스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인간 삶의 진실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의 주인공이 겪는 좌절과 패배를 통하여 우리는 사태의 진상에 다가서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유한성과 위대성을 동시에 추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한한 인간의 위대성은 주인공이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지련다는 영웅적인 태도에서 나온다.

 

나는 이러한 경험이 비극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위대한 문학은 고통을 통하여 인간의 진실에 이른다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시작하면서 들은 바 있는 박완서나 유종호의 주장도 바로 이런 생각을 말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 카타르시스는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마음의 고통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글을 쓰는 것이다. 글 쓰기는 내 고통을 분석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 서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객관화시키는 계기를 갖도록 해 준다. 사실, 세상의 많은 고통은 나 혼자만 겪는다고 과장하는 데서 나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지나치게 비탄의 표정을 만들어 갖게 된다. 그런데 그 고통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운 일이지만 진정으로 벗어나자면 이 길을 걷는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내 자신의 잘못이 보이기 시작하고 더불어서 내 것만을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도 하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내게 고통을 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글 쓰기는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내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해 준다. 쉬운 예를 들어서, 실컷 울거나 내 사정을 친구에게 숨김없이 얘기하고 나면 시원하다는 기분을 느낀다. 이 결과로 전과는 다른 새로운 내가 되었다고 해도 좋다. 지금까지 나를 무겁게 했던 원한이라든지 부정적인 감정에서 어느덧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느낌이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게 카타르시스의 요체다.

 

카타르시스는 고통스러운 즐거움이다. 고통스러운 일을 회피함이 없이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 대함으로써 그것을 포함하는 더 높은 진실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타르시스는 고통을 자기 것으로 하련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문학과 글 쓰기는 바로 이 고통스러운 즐거움을 체험하도록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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