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방학 동안에 열이틀에 걸쳐서 경기도 안산에서 우리 목포대학까지 혼자 도보 여행을 했다. 다른 데서도 몇 번 이야기한 바 있는 한비야의 여행기와 몇 권의 히말라야 등반 이야기가 걸어 보라고 부추겼다. 후자가 더 그랬는데, 왜 등반가들이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심지어 죽거나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기면서 산에 오르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고산 등반은 고난도의 기술은 물론이고 강인한 체력과 의지 같은 것이 골고루 갖춰지지 않으면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은 그런 차원의 것이어서 산책하듯이 산에 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도대체 상상조차가 불가능한 세계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들이 겪은 고통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독서나 경험을 통해서 어렴풋하게나마 고통이 참다운 인간적 성숙의 뿌리가 된다는 점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로맹 롤랑은 베에토벤과 같은 영웅(오직 마음으로써 위대하였던 사람)이 겪은 고통(고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의 생애는 거의 언제나 기나긴 수난의 역사였다. 비극적 운명이 그들의 넋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병고와 간난의 철상(鐵床)-위에다가 단련시키고자 하였거나, 혹은 그들의 동포가 뼈아프게 당하고 있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굴욕의 광경을 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심정이 갈가리 찢어지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생활이 여지없이 거칠어졌거나, 하여튼 그들은 나날의 시련의 빵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의지력으로써 위대하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또한 불행을 통하여서 위대해졌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그러므로 너무 서러워하지 말라. 인류의 우월한 사람들이 그대들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용기로써 우리들 자신을 북돋우자. 인류의 우월한 사람들이 그대들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용기로써 우리들 자신을 북돋우자. (중략) 그들의 작품을 묻지 않고서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서라도, 우리들이 그들의 눈 속에, 그들의 생애의 역사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인생이란 고뇌 속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풍요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로맹 롤랑, 이휘영 역, <<베에토벤의 생애>>, 문예출판사, 1989, 11쪽)사람들은 고산 등반가가 그러한 것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혀 보고 싶어하며 일부러 고통을 겪기도 한다. 비극을 읽는 것에도 이와 비슷한 심리적 동기가 작용할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기도 이런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카타르시스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정신적인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을 뜻한다. 피하고만 싶은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 서서 그 고통을 객관화시킨 결과이다. 고통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내 잘못이 보이기 시작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내게 고통을 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타르시스는 고통을 자기 것으로 하련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내가 도보 여행에서 이런 카타르시스를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 등반가들과 비교하면 도대체 말하기가 부끄럽지만 저녁이 되면 지쳐서, 쉬었다가 일어나려면 다시 주저앉고만 싶었으므로 그 비슷한 순간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확실한 것은, 걷는 것이 무척 즐거워서 이번 겨울 방학에도 또 걷겠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빨리 방학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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