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금요일(2006. 2. 17)의 <<한겨레>> (2)

귤밭1 2006. 2. 22. 09:00

다음은 제인 구달의 <<희망의 밥상>> 서평 기사다. 제대로 잘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뿐더러 이 책의 진단과 처방이 절실해서 좀 길기는 하지만 다 옮기도록 하겠다.

슈퍼돼지는 관절염, 슈퍼닭은 심장질환

‘침팬지 엄마’ 제인 구달이 팔을 걷었다. 약탈적인 인간에 의해 숲이 파괴되면서 위기에 놓인 침팬지를 관찰하는 것으로는 결코 성에 차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숲을 떠나 행동해야 할 때임을 선언했다.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를 주유하면서 설파해온 위기의 실체를 <희망의 밥상>(사이언스북스 펴냄)이란 보고서에 담았다. 침팬지가 아닌 인류의 멸절로 이어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인간을 향해 던지는 뼈저린 외침이다.
 
한입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은 먹거리의 정체를 생각해 보았는가. 대부분 밝은 조명과 가공, 포장으로 소비자의 눈을 가린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장막을 걷으면 냉동트럭이 보일 터. 북미의 가정에서 신선식품으로 간주하는 식품은 10년 전보다 25% 더 길어진 1500~2000마일을 이동해온 것이다. 이는 식품 자체의 에너지보다 밥상까지 운반하는데 드는 에너지가 더 크다는 뜻이다. 심지어 10배가 넘는 것들도 있다. 지구 온난화와 직결되는 문제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사선 쬐기, 착색제 살포는 어떤가. 한걸음 더 나아가 익혀서 수확하는 유기농산물을 외면하고 때깔좋고 오래가는 유전자조작농산물을 선택하는 현실은 어떤가? 그 배후에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다국적 식품기업이 도사리고 있다!

 

신선도 명분 방사선 쬐고 착색

 

1994년 멕시코, 산마을과 골마을을 비교해 보았다. 산마을은 무농약, 골마을은 나비를 비롯한 곤충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충제를 썼다. 아이들한테 사람을 그리라고 했다. 산마을 아이들은 간단하게 그려냈지만 골마을 아이들은 사람을 전혀 닮지 않은 도형을 그렸다. 그 아이들은 기억력과 창의력이 떨어지고, 쉽게 분노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2차대전 신경가스에서 유래한 살충제는 40년 전보다 3배가 더 뿌려진다. 해충에 직접 닿은 양은 0.1%. 나머지는 다른 생물을 죽인다. 다른 생물에는 인간도 포함돼 파킨슨병을 부르고 태아는 자궁에서 죽기도 하고 선천성 기형이 되기도 한다. 살충제의 남용은 전통농법의 몰락에 따른 것. 몇해에 한번씩 논밭을 놀리는 휴경제, 해를 걸러 다른 작물로 바꾸거나 한땅에 섞어심는 농법은 증산과 편리라는 명목으로 포기된 지 오래다. 지력의 고갈과 단일경작은 병충해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살충제 사용은 늘어날 수밖에. 화학비료, 제초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꾀는 살충제를 농작물의 DNA에 집어넣어 소위 유전자조작농산물을 만들기에 이른다. 미국산 콩 81%, 옥수수 40%, 면화 73%가 그렇다. 살충제 사용이 줄어 환경에 좋다지만 그 효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동물들은 알고 있다. 젖소는 유전자조작 옥수수와 보통 옥수수 가운데 후자를 먹는다. 야생 너구리와 사슴 역시 유기농 밭만을 골라 습격한다. 유전자변형 감자를 먹은 쥐는 면역체계와 흉선과 비장이 손상되고 간, 고환, 뇌 크기가 작다. 웃기는 것은 이 사실을 공표한 과학자는 실직되었고 과학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배후에 도사린 다국적 기업은 급기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씨앗을 특허 내 독점하려고 한다. 몬산토, 뒤퐁, 다우 등이 그들이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은 저개발국한테 다국적기업에 협조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축산업도 다를 바 없다. 한마디로 공장식 사육장. 동물들을 사물 또는 기계로 취급한다. 닭, 오리, 칠면조, 돼지, 소 이것들 모두는 더럽기 짝이 없는 좁은 공간에서 일체의 불필요한 운동과 신진대사가 배제된 채 오로지 달걀과 고기와 우유를 생산해낸다. 닭은 부리와 발톱을 자르고 밤낮 주기를 바꾼다. 수평아리는 산 채로 빻아져 닭모이로 된다. 젖소는 젖을 더 짜내려 호르몬을 주사하고 인공수정으로 해마다 송아지를 빼낸다. 슈퍼사이즈 식용수소(벨지앤 블루)는 뼈가 약해 겨우 설 뿐더러 스스로 짝짓기도 못한다. 슈퍼돼지는 관절염, 슈퍼닭은 심장질환에 시달린다. 모두가 인간의 탐욕에서 빚어진 기괴한 현실이다. 바다라고 다를까. 가두리 양식장이 물고기의 자연 서식지를 잠식하여 어장은 황폐하고 어부들은 빈 손이다. 전세계 맹그로브 숲 40%를 양식장을 만든다며 훼손시킨 결과 지진해일 때 수천명이 죽었다. 양식새우에서는 암을 일으키는 클로람페니콜, 니트로퓨란 항생제가 나온다. 신경기능 장애는 물론 불임에 이르게 하는 수은이 해산물을 통해 유입돼 가임기 여성 21% 머리카락에서 수은이 검출됐다는 보고다.

 

‘침팬지 엄마’가 치를 떨 만하지 않은가. 밥상을 바꿔야 한다! 그의 외침은 절박하다.

 

채식주의자가 되라. 유럽의 식용가축 모두에게 먹일 풀과 곡물을 재배하려면 유럽연합 전체의 7배의 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가난한 나라의 부족한 토지가 사료를 위한 외국기업한테 빼앗겨 유럽인들은 너무 먹어서 죽고 아프리카인들은 못 먹어 죽는다. 1헥타 땅에 감자를 심으면 22명이 1년을 먹은다. 소, 양을 기르면 1~2명분밖에 되지 않는다.

 

병아리 수컷 산 채 빻아 닭모이로

 

신토불이 제철 유기농 식품을 먹자. 이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표다. 소비자와 지역공동체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다. 장거리 운송에 드는 에너지도 필요없다. 교토의정서가 목표로 한 온실가스 7% 감축은 모든 농지를 유기농으로 바꾸면 된다. 유기농이 비효율적이고 수익도 떨어진다는 말은 대기업의 선전일 뿐이다. 환경친화 농사를 짓는 미국의 농부가 기업형 농장보다 많은 소출을 낸다. 특히 가뭄과 홍수때 33~41% 소출이 많다.

 

패스트푸드를 먹지 말자. 우리 아이들의 학교급식에서 맥도널드를 추방하자. 이유없는 폭력의 증가, 패스트푸드 소비의 증가, 정제설탕의 섭취량 증가 등 세 통계는 밀접히 관련돼 있다. 웃기는 통계 하나. 승객들 과체중으로 2000년 항공사들은 80년에 비해 3억5000만 갤런의 연료를 더 썼단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슈퍼마켓에서, 음식점에서 물고 늘어지라. 소비자가 변하면 기업이 바뀌고 우리의 밥상이 바뀌고 우리의 미래가 바뀐다. “한사람 한사람이 차이를 만든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원문)

충격적인 내용이지만 아주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평소에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데서도 많이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와 연관되는 것으로 내 글(글 1, 글 2)도 읽어 보기 바란다). 그래도 다음 부분은 처음 듣는 소리였고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게 뭐냐는 생각을 하도록 했다.

인간의 꾀는 살충제를 농작물의 DNA에 집어넣어 소위 유전자조작농산물을 만들기에 이른다. 미국산 콩 81%, 옥수수 40%, 면화 73%가 그렇다. 살충제 사용이 줄어 환경에 좋다지만 그 효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동물들은 알고 있다. 젖소는 유전자조작 옥수수와 보통 옥수수 가운데 후자를 먹는다. 야생 너구리와 사슴 역시 유기농 밭만을 골라 습격한다. 유전자변형 감자를 먹은 쥐는 면역체계와 흉선과 비장이 손상되고 간, 고환, 뇌 크기가 작다. 웃기는 것은 이 사실을 공표한 과학자는 실직되었고 과학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배후에 도사린 다국적 기업은 급기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씨앗을 특허 내 독점하려고 한다. 몬산토, 뒤퐁, 다우 등이 그들이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은 저개발국한테 다국적기업에 협조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어릴 때 소를 먹였던 경험으로 보건대 동물은 본능적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풀을 아는가 보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사람도 소가 하는 대로 가려서 먹으면 된다고 했다. 소는 고사리를 안 먹는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한동안 고사리가 몸에 나쁘다는 얘기가 돌았다. 과학적인 근거와 관계 없이 나는 소에 기대어 고사리가 우리 몸에 좋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요즘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희망의 밥상>>에 따르면 자유무역협정의 비합리성과 불평등성이 아주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자기 동네에서 제철에 나온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 수송 거리가 멀어질수록 이른바 그 잘난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해로운 온갖 짓이 가해진다. 우리 몸이 병드는데 이익 좀 본다고 그게 그리 중요할까? '침팬지 엄마'의 절박한 외침을 구호를 따라 하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 보자.

채식주의자가 되라. 유럽의 식용가축 모두에게 먹일 풀과 곡물을 재배하려면 유럽연합 전체의 7배의 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가난한 나라의 부족한 토지가 사료를 위한 외국기업한테 빼앗겨 유럽인들은 너무 먹어서 죽고 아프리카인들은 못 먹어 죽는다. 1헥타 땅에 감자를 심으면 22명이 1년을 먹은다. 소, 양을 기르면 1~2명분밖에 되지 않는다.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해도 고기의 경우 옛날에 잔치나 제사 때나 올라오는 식으로 먹는 횟수를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 비만 때문에 고생하는 결정적인 원인도 이 육식과 과식에 있는 것 아닌가.

 

그 다음 쪽에는 <<한국 온천 이야기>>라는 책의 소개와, 내가 부러워하는 또 한 사람인 정혜신의 <<삼색공감-사람, 관계, 세상에 관한 단상들>>에 대한 도서평론가 최성일의 상대적으로 좀 짧은 서평이 실려 있다. 정혜신은 이 신문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데 그의 글을 인용하여 뭐라고 한 적이 있으며(여기를 보세요), 이 책도 내 독서 목록에 올라 있다는 말만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좀 건너뛰어서 <<그림자의 짧은 역사>>라는 신간 번역서는 기자가 서평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는 대로 전문가가의 수준을 갖추지 못하면 접근이 쉽지 않은 영역을 다루는 것 같다. 이제는 이런 책에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식에 대한 열정이 식은 탓이리라! 하루라도 젊었을 때 탐욕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친절한 서평도 읽을 만하다. 다 알다시피 이 소설은 새롭게 출발하는 젊은이는 물론이고 그 젊음과 멀어진 이들에게도 필독서다. 우리 어른은 이 작품에서 속물적 세계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순수에서 나온다는 점을 아프게 확인한다.

청소년기란 아이에서 어른으로 눈떠가는 과정이다. 홀든이 여동생을 기다리며 본 초등학교 담벼락의 욕과 낙서들처럼 이 세상엔 인간 본성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위협하는 거짓들이 가득하다. 홀든이 경험한 어른의 세계란 물질주의적이며, 비인간적이고, 공허한 속물들의 세계일뿐이었다.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원래 있었던 이런 천부적인 선한 본성은 점차 잃고, 세상의 게임법칙에는 더욱 유능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장’이 고작 그런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저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른이 되면 저항했던 모든 소년들은 사라지고 현실세계에는 유능한 게이머들만 가득하게 된다. 우리 모두도 한때 순수한 세계에서 시작했건만 왜 어른이 되면 다 잊어버리는 것일까? 워즈워스는 설령 그 세계가 세월이 흐르면 사라져버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세월 속에 남아 있던 광채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선한 사람의 본성을 잠시나마 간직했던 어린시절은 이런 속물적인 세상에 맞설 힘을 주기 때문이다. 워즈워스는 저항과 공감은 결국 순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박혜영, <어른이 된다는 것은 유능한 '게이머'가 된다는 것>, 글 전문)
김정란의 은 깊은 울림을 주지 않는다. 초콜릿의 사회, 경제적인 맥락의 핵심을 건너뛰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발렌타이 데이의 상업주의야 다시 되풀이하면 식상한 주제가 될 테지만 초콜릿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를 알면 그것의 쓰라림과 달콤함을 얘기하는 것은 현실을 비켜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초, 중앙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난생처음 보는 신비한 음료를 발견했다. 카카오콩을 으깨 만든 달곰쌉쌀한 맛의 코코아다. 약용으로 쓰이는 귀한 것이어서, 유럽에 전해진 뒤로도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19세기 초 고형화 기술이 개발되면서 지금의 초콜릿 과자가 됐다.

 

일반인이 즐기는 값싼 기호품으로 대중화한 건 원료인 카카오콩의 대량생산 덕분이었다. 전세계 생산량의 70%가 코트디부아르, 가나 등 아프리카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된다. 카카오 농장의 가격 경쟁력은 어린이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에서 나온다. 국제열대농업기구 보고서를 보면, 아프리카의 수만개 카카오 농장 중 1500곳을 조사한 결과 9~12살짜리 어린이 노동자가 3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부모들은 빚 갚을 목적으로 단돈 몇 달러에 아이들을 내다 판다.

 

다국적 초콜릿 업체들은 농장을 직접 소유, 운영하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아프리카 정부와 지주들은 카카오 수출을 늘리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경작지를 늘려왔다. 공급과잉은 카카오 값을 더 떨어뜨렸고 자연히 노동착취도 심해졌다. 경작지가 죄다 카카오 밭으로 바뀌어 매일 먹는 기초 농산품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나라도 있다.

 

비난이 거세지자 업체들은 앞다퉈 ‘윤리적인’ 초콜릿과 코코아를 생산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달 초에도 네슬레 등 최대 초콜릿 업체들이 어린이 인신매매와 강제노동 시정 약속을 어긴 혐의로 법정에 섰다.

 

해답은 소비자 쪽에서 내놨다. 조금 비싸더라도 성인 노동자한테 임금을 치르고 생산한 원료를 사용한 제품을 쓰자는 ‘공정무역’ 운동이다. 카카오뿐 아니라 커피, 설탕 농장, 동남아시아의 신발 공장에서 어린이 노동을 없애자는 취지다. 오늘 연인을 위해 초콜릿을 고른다면 혹 공정무역 인증이 있는지 한번쯤 살피면 어떨까. 물론 쉽게 찾을 순 없겠지만.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원문)

내가 안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가끔씩이라도 근원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은 버리고 싶지는 않다.

 

마호메트를 풍자한 만화 사건의 겉과 속을 다루는 도정일의 도 이번에는 평범하게 다가온다. 이 사태를 다루는 글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람과 문화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태도가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점은 늘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깃든 배타주의는 섬뜩한 바가 있다. 멀리갈 것 없이 중국의 조선족이나 동남아 국가에서 온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면 안다. 따라서 우리 언론에서 보인, 미국에서 성공한 혼혈 선수에 대한 열광은 낯 간지러운 데가 있다. 아무리 잘 봐줘도 우리의 일등주의와가 순수 혈통주의 혹은 가족주의를 이겼을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편하게 산다!

 

이제 마지막이다. 늘 손꼽아 기다리는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횡단기를 읽을 차례다(전에 이 여행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여기를 보세요). 오늘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멋진 구절을 만난다.

스페인에서 온 카를로스와 고르고 형제를 만났다. 30대 초중반의 이들은 3 년째 자전거 여행하는 중인데 아프리카와 중동 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미국에 들어왔다. 동생인 고르고는 3만4600㎞, 형인 카를로스는 3만㎞를 달려 지구의 둘레 4만77㎞에 육박하고 있었다.

 

고르고는 시정부, 카를로스는 중앙정부에서 일하고 있어 5년 이상 일하면 자기가 일한 기간만큼 무급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차림은 수수했다. 자전거도 20만원 안팎으로 대당 보통 100만원이 넘는 여행용 자전거가 아니었다. 바퀴를 손쉽게 뺄 수 있는 퀵 릴리스도 없다. 사이클화도 신지 않았다. 속도계도 없다. 잠은 길가나 야영장에서만 잔다. 눈빛은 너무 맑다. 세상을 보고 싶어서 다닌다고 했다. 욕심을 줄이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이치를 이들에게서 다시 확인한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39)>, 글 전문)

이 형제들은 여행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일상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일한 만큼의 무급 휴가를 떳떳하게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은 아울러 열심히 돈을 모으지 않고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우리는 돈을 벌려고, 또는 집 한 채를 마련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즐겁게 노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마땅하다.

 

이제 내 글도 마지막에 이르렀으므로 결론을 내리자. <<한겨례>>는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한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큰돈 들이지 않고 아이들에게 논술 공부를 시키려거든 이 신문을 아이들에게 읽혀라. 다른 신문에 실리는 유명한 논술 강사의 글은 내 눈으로 보건대 그냥 기술을 익히는 데만 소용이 있을 뿐이다. 당장 점수를 얻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그것만으로는 좋은 글을 쓰게 할 수는 없다. 직접 글을 읽으면서 비판적인 관점을 체화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겨례>>의 독서는 이 수준에서 필요하고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주 금요일을 기다리자.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