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월드컵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2002. 6)

귤밭1 2006. 6. 15. 10:08

<<한겨레>>(2002년 6월 20일)에 좋은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월드컵 과열보도하는 언론>이 그 제목입니다.
 

월드컵 축구대회의 한국 대표팀 경기의 승부에 대한 언론의 집착이 국민적 열기에 편승해 도를 훨씬 넘어섰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아무리 한국 팀이 선전해왔다고 하더라도 지난 경기 장면을 연일 쉴 새 없이 내보내며 승리 주문만 되뇌거나 최소한의 객관성도 없이 아전인수 격으로 경기를 전망하거나 해석하며 바람몰이에 나서는 언론의 행태는 언론 본연의 자세를 상실한 점에서는 물론이고 스포츠 정신의 망각이나 대회 개최국의 자국 중심주의라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대열에서 <<한겨레>>도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16강전을 앞두고 인터넷을 떠도는 허무맹랑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을 기사화한 점(<주문 걸린 축구강호들>, <<한겨레>> 6월 17일치)과 18일치에 실린 칼럼을 보면, 승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한다.

 

고희범 논설위원은 <다시 우리를 열광케 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미국에서 4만~7만원씩에 팔리는 수제 축구공을 깁고 800원을 받는 파키스탄 어린이들의 갈라터진 손은 월드컵의 환호에 가려졌다. 축구가 국가주의를 조장하고 국민의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해놓고도 그 말을 반박이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글을 잇는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의 단합과 새로운 도약을 위해 축구만 생각하기로 하자." 이 정도의 열정이라면 '한국, 우승도 가능'이라는 제하가 왜 등장하지 않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그래야 국민들에게 훨씬 더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 국제축구연맹이 다국적 기업의 대리인일 뿐이고 월드컵 대회가 맹목적인 국가주의와 상업주의를 조장한다는 주장은 어제오늘 제기된 문제가 아니며, '오늘'이라는 하루를 위해 잠시 제쳐놓아도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축구만 생각하면 국민의 '단합'과 '도약'이 절로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난한 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당하는 노동 착취의 문제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나라 대표 선수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천지를 울린다 하더라도, 대회 기간 내내 일터를 빼앗긴 노점상들이나 경기장 건설에 삶의 터를 잃은 철거민들의 한숨이 그것에 파묻혀도 될 만큼 사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축구 대표팀의 선전이 국민의 '단합'이나 '도약'에 기여한다는 말도 피상적이거나 객관적 증명이 불가능한 주장에 가깝다. 동네 경기든 국제 경기든 축구를 평소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한다면, 한국인들이 국제적 규모의 경기가 있을 때나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빨간 옷 걸치고 광적으로 응원한다고 하여 그것이 개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 나라 국민들에게 화합이나 단결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몇 개의 운동 경기를 서로 어깨 겯고 관전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계층적, 지역적, 성적 갈등 등은 사회 구성원들이 대등한 위치에서 벌이는 경쟁의 결과물이 아니라 정치적 다수의 소수에 대한 일방적 배제와 차별에 기인한 것임을 인식한다면, 월드컵 경기에 붙여진 국민적 화합으로서의 축제라는 이름은 허구적이거나 변죽을 울리는 언사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 거리로 몰려나오는,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저 인파들의 환호는 도저히 합리적으로 해결하기가 난망해 보이는 사회 갈등과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을 축구 경기에 홀림으로써 잠시 잊고 싶은 욕구의 발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국 대표팀의 승리에 대한 국민들의 집착에서 언론이 할 일은, 잠시나마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의 어려움에 대한 그들의 토로를 헤아리는 것이지, 미치고자 하는 이들을 애국심을 구실로 더욱 미치도록 부추기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월드컵이 지구촌 축제라는 이름에 최소한이나마 값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언론은 월드컵을 즐기는 주체를 국민이 아니라 대중으로, 그 즐김도 자국 팀의 승리에 대한 즐김이 아니라 경기 자체에 대한 즐김으로 바꾸어가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정문순/ 자유기고가

참고로, 여기를 누르면 월드컵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꼭 보기를 권합니다.

 

세계의 일류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우리 몸이 어떻게 저리 유연하며 아름다울 수 있는지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들였을 시간과 정성을 생각하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이 월드컵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지나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텔레비전의 뉴스를 보면 무섭기까지 합니다. 어제, 그저께는 경기가 없는 날이어서 제대로 정해진 시간에 뉴스를 내보내기는 했는데 거의 월드컵 얘기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같은 장면을 지겹게도 틀어대는데 누가 우리를 세뇌시키기 위하여 저러는 게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상상이 들 정도였습니다. 월드컵을 치른다고 해서 다른 중요한 일들이 안 일어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닐 텐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히딩크 현상에도 못마땅한 데가 있습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반응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히당크 교라든지 히딩크 당 같은 얘기를 들으면 우리 사회의 획일주의적인 가치관을 뼈 아프게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특히 우리 정치인에 대한 환멸이 이러한 우스개를 만들어 낸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히딩크는 유능한 축구 감독일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그를 정도 이상으로 신화화하는 데서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징후를 읽습니다.

 

'붉은 악마'에 대해서 긍정 일변도로만 보는 것에도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참고로 이 응원단에 대한, 읽을 만한 글로는 <월드컵과 진보?>, <질서정연한 열광?>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가장 먼저 우리 젊은이들이 평소에 심리적으로 많이 억압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합니다. 아마 학생들을 가르치는 처지에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너무 지나친 열정입니다. 이번 지방 선거에서 나타난, 젊은이들의 낮은 투표율을 보면 내 판단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는 열기가 우리의 사회나 정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으로 나타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붉은 악마'의 일방적인 응원도 내게는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정문순의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응용해서 얘기하면 이제 응원이나 관전은 "자국 팀의 승리에 대한 즐김이 아니라 경기 자체에 대한 즐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속 좁게 자기 나라 축구팀만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너무 슬픈 일입니다. 여기서도 다양성을 무시하는 획일주의의 벌거벗은 모습을 봅니다. 혹시 초대형 태극기가 젊은이들의 개성적인 얼굴과 생각을 가려 버린 것은 아닐까요?

 

다른 글(<유월을 맞으며>)에서 월드컵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타자를 존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피력했는데 별로 현실적인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아 씁쓸합니다.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우리나라가 경기를 하더라도 우리 선수들만을 일방적으로 응원할 일이 아닙니다. 그냥 잘하는 선수들을 위하여 박수를 치면 됩니다. 못하는 선수에게는 안타까움의 눈길을 보내고 말입니다. 이 세계화 시대에 우리를 내세우면서 남과 우리를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한마디로 촌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 세계일 것입니다.(전문)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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