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한편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분은 꼭 듣기 바랍니다.
에 골절상을 입었거나 수술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다 아문 상처에도 가끔은 욱신거리는 통증이 찾아온다는 것을.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오해를 풀었고, 용서해서 이제는 미련이 없다 싶던 과거의 기억이 어느 순간엔 불쑥 고개를 들어 다시 마음을 헤집습니다. 특히 과거 아팠던 순간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현재의 고통은 배가됩니다.
그러니 인간이 마음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사람들은 예외 없이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심리적인 고통이나 장애가 인생에서 불가피한 것이라면 지나치게 ‘완치’에 집착해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순간순간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조절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평온을 되찾아야 하나, 혹은 지금 우리가 서있는 현실과 용감하게 맞서려고 내면의 공포와 두려움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생각이 많은 부분 ‘오해’나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보거나 이용하려고 한다거나 미워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힘들었는데, 결국 ‘착각’이거나 지레짐작이었음이 밝혀져 맥빠지는 경험을 종종 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추측만으로 화를 내거나 마음의 상처를 만들지는 마세요. 차라리 그에게 가서 자신의 생각을 완곡하게라도 확인해 보세요. 그럴 용기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상대의 의도에 집착하는 일을 포기하고 좀더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시면 어떨까요.
‘착각’은 과거의 기억 속에 더욱 강하게 존재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받아들인 세상에 대한 정보는 왜곡되어 저장되기가 쉽습니다. 부모의 이혼을 겪은 아이가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흔한 예이며, 맏이에 대한 부모의 기대나 칭찬이 부러웠던 둘째가 ‘부모는 나를 미워한다’고 판단한 뒤 어린 시절을 질투와 좌절 속에서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착하게 굴어야 엄마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으며 아이를 통제하면 아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거나 미움을 받으며 살았다, 혹은 착하지 않으면 버려질지도 모른다, 라는 과거의 기억은 환상이거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착각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아이들은 세상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파편화된 정보들로 받아들이고 또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의 각색까지 하게 되지요.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착각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가다가 연인 관계에서든 직장의 인간관계에서든 자꾸 적용하려고 합니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분노와 두려움, 차별받고 있다는 억울함, 자신은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비애감이 사람들을 고민과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특히, 나는 어려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피해자일 뿐이다, 라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쩔쩔매거나 맥없이 징징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정신적인 성장이란 착각과 환상으로 이루어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끌어올려서 그것과 직면한 뒤,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내고, 훈련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심리 치료나 자기 성찰의 궁극적인 목표는 과거 경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한 것 이외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없으며 과거의 경험과 기억은 현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재료일 뿐입니다. 과거 어린 시절에 용감하게 직면하시되 그곳에서 교훈을 얻으셨다면 남아 있는 통증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시고 현실로 돌아오세요. 그런 뒤 그 교훈을 바탕으로 어떻게 현실을 개선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저희는 ‘형경과 미라에게’를 통해 독자들과 깊게 교류하는 행복한 글쓰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면서 저희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온라인 ‘형경과 미라에게’ 게시판에서 시종일관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서로에게 댓글을 달아주며 상담공동체를 만들어 가시는 수많은 독자 여러분들께 놀라고 또한 많이 배웠습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좀더 날것의 느낌이 나는 숨겨져 있던 우리 내면의 욕망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분위기를 주도했던 저희의 한계였을 것입니다.
행복했던 만큼 아쉬움이 크지만 저희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공부가 더 필요함을 느끼며 연재를 마치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온오프라인 독자님들께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김형경 소설가·박미라 〈이프〉 편집위원(원문)
<<한겨레>>에 연재됐던 <형경과 미라>의 애독자였는데 끝난다니 몹시 아쉽습니다. 그 동안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상처로 괴로워하는 이들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조언하는 모습에서 깊은 지혜를 만나는 듯했습니다. 위의 글에서도 충분히 드러나는데, 마음이 아픈 이들과 공감하며 깊이 교류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언자도 함께 배우는 거라는 점을 늘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나는 김형경의 소설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서도-소설의 육체 속에 녹아들지 못한 그의 관념성이 책을 다 읽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이 연재를 읽고서는 늘 감탄하는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여러분도 찾아서 눈여겨보기 바랍니다. 마음이 아픈 분에게는 특히 권하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온 분들은 제목과 너무 동떨어진 얘기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제대로 되지 못한 문장이 보여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좋은 내용이어서 더욱 그런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거나 미움을 받으며 살았다, 혹은 착하지 않으면 버려질지도 모른다, 라는 과거의 기억은 환상이거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는 어려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피해자일 뿐이다, 라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쩔쩔매거나 맥없이 징징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이지 본 따서는 절대로 안 되는 문장이 이렇게 두 개나 됩니다. 밑줄 친 대로 "모른다, 라는"과 "뿐이다, 라는"이 그것입니다. '라는'은 조사의 '이다'의 활용이므로 무조건 앞말에 붙여 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조사 앞에 쉼표를 찍는 것은 도대체가 말이 안 됩니다. 그냥 '모른다는' '뿐이라는'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일부러 우리말에 상처를 줄까요? 마음이 아프듯이 말도 그렇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은 유형에 드는 것으로 "아끼는 책이다라고 했다." "그가 갔다라고 말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각각 "아끼는 책이라고 했다."와 "그가 갔다고 말했다"로 고쳐야 합니다.
대화하다 보면 이런 투의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아마 그 영향이 글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젊은 작가들이 쓰는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거든요. 아무튼 이 문장을 보면서 '우리말을 의식적으로 쓰고자 하는 <<한겨레>> 너마저도" 하는 심사를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필자가 저렇게 엉터리로 쓰더라도 편집자는 걸러야 하지요.
시비를 거는 김에 다음 문장도 봅시다.
과거 어린 시절에 용감하게 직면하시되 그곳에서 교훈을 얻으셨다면 남아 있는 통증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시고 현실로 돌아오세요.되풀이되는 말은 하나로 줄여야 합니다. 이 문장에서는 '시'가 문제입니다.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합니다.
과거 어린 시절에 용감하게 직면하되 그곳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남아 있는 통증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현실로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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