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하루에 한시간 반씩 영재교육원에서 '논리력 키우기'를 주제로 수업을 했다(수업 자료는 여기를 보세요). 그 소감을 간단히 얘기하고자 한다.
첫날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137명이나 되는 아이들-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 2학년생들-이 수업 시작하자마자 떠들고 자고 그랬다. 서너명의 조교들이 돌아다니면서 깨우고 조용히 하라고 그러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화도 낼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이들 앞에서 괜히 나만 혼자 우스운 사람이 되겠기 때문이다.
대학생 앞에서 수업하던 솜씨라 재미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흥미를 갖고 들으리라 생각해서 글쓰기를 교육의 핵심적인 영역으로 다루는 영국의 예를 초등학교 6학년 지리 문제까지 소개하면서 얘기했는데 아이들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글쓰기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이르러서는 내가 먼저 맥이 빠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는 무례함에 깊이 실망했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점을 실감했다는 점이 첫날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라고 자위했다.
글쓰기에 대한 무관심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물어 보니까 중학생이 되면 일기를 쓰는 학생이 거의 없었는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하나같이 선생님이 검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겨우, 그것도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즐겁게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꿈 같은 얘기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나는 환상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수업을 마치면서 과제로 나무를 생각해 보자고 했다. 구체적으로 '내가 나무라면'이라든지 '나무가 사람을 본다면'이라는 예를 들었다. 저녁에도 다른 일정이 있으므로 쓸 시간은 없을 것 같아서 생각만 해 보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수업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간신히 첫날의 수업을 끝냈다.
둘째 날이다. 처음부터 졸리면 자라고 해 버렸다. 억지로 깨운다고 내 말이 들리는 것은 아닐 테니 관심이 있는 아이들만 듣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에 떠들지는 말라고 사정했다. 2/3 이상이 자는 쪽이다. 그래선지 조용하라는 말을 몇 번 하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첫날에 낸 과제-생각해 본 학생은 손을 들라고 했더니 열 몇 명밖에 안 들었는데-를 몇 아이에게 물어 보기도 하고-첫째 아이의 대답은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요'였지만!(여기를 보세요)- '생각하는 법'을 예를 들어가며 얘기한 것이 첫날보다 좋은 분위기가 되는 데 조금은 작용했을지 모르겠다. 특히, 참고 자료로 뽑은 서민 교수의 <선풍기 바람과 사망 사고>가 좋았던 것 같다. 아이들 앞에서 몇 대목을 읽으면서, 필자가 참 쉽게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글을 쓰는 재능을 지녔다고 감탄했다. 많이 연습한 결과일 것이다.
조용히 하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해병대 출신이라고 큰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나도 저 아이들도 불쌍하다는 생각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선생이나 부모는 아이들을 통제하거나 금지하고, 아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채로 억지로 따라가는 데 어느덧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은 이런 과정의 끊임없는 되풀이 속에서 저절로 굴종을 내면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 주체성을 가진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노예나 하인의 정신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발성을 잃어버린 이런 아이들을 영재라고 할 수 있을까?
거친 일반화는 뛰어난 개성을 사장시켜 버리기가 쉽다. 눈을 빛내며 듣거나 질문을 하면 그럴듯하게 대답하는 아이가 없지 않았다는 점도 얘기해야 정당한 처사가 될 것이다. 이런 아이들로 해서 수업을 마칠 때쯤에는 하루쯤 더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 말이 그 몇 아이의 마음에 아주 조그맣게라도 스며들었기를!
좋은 경험을 했다기에는 슬픔이 더 큰 그런 시간이었다.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
(하루 지나 덧붙임)
엄살을 지나치게 피운다고 하는 독후감을 가진 이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떠들어야 아이가 아닌가? 더운 여름날 오후에 잠이 오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한 방에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모아 놓고 제대로 수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이상한 것 아닌가? 이런, 반박하기 어려운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도 같다.
하룻강아지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렇지만 저절로 통제에 익숙해지면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아울러서 창의성도 사라지게 된다는 점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 교육이 이런 쪽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틀 동안의 수업에서 경험한 것도 이런 현실의 구체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
(관련 자료 덧붙임)
어른을 쩔쩔 매게 할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가진 특권의 하나다. 여섯 살짜리가 “엄마, 불은 왜 뜨거워?”라고 물으면 엄마는 쩔쩔 맨다. “뜨거우니까 뜨겁지”라고 말하는 것은 대답이 아니란 걸 엄마는 안다. “얘는, 안 뜨거운 불도 있니?”라며 슬쩍 역공을 시도해보아도 마음은 개운치 않다. 그건 곤경을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고 잔꾀일 뿐 대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라고 말했다가는 엄마의 권위가 말이 아니다. “너 그런 쓸데없는 거 물어볼래?”라고 야단치는 것은 그 결과가 너무도 파괴적이다. 야단맞은 아이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시무룩해진다. 이 ‘시무룩’이 자꾸 쌓이면 아이는 질문하기 전에 망설이고 눈치보고, 그러다가 질문을 상실한다.
질문을 상실한 아이들이 자라 바보가 된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질문 앞에 최고로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 최고로 경건해져야 하는 것은, 아이들을 바보로 키울 권리가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노벨상 수상자는 “1+1이 어째서 2가 되어야 합니까?”라는 한 소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쩔쩔 매면서 무려 11장이나 되는 ‘답변서’를 쓴 적이 있다. 그는 아이들의 질문 앞에 경건해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이 대학에는 어떤 학생들이 옵니까?”라는 학부모 질문에 “어려서 질문이 많았던 아이들이 자라 우리 대학으로 옵니다”라고 대답한 총장이 있다. 그는 질문의 위대함과 경건함을 아는 사람이다. 질문이 죽으면 호기심도 죽고 호기심이 죽으면 탐구의 열정도 죽는다.
밖으로 공부하러 나간 한국인 유학생들에게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세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미국 대학 교수들이 많다. 질문이 없다, 자기 생각이 없다, 토론할 줄 모른다는 것이 그 3대 특징이다. 물론 이건 과장일 수 있다. 유학 초기에는 우선 말이 잘 안되니까 질문이 있어도 없는 척, 생각이 있어도 없는 척 해야 할 때가 많다는 것을 유학생활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안다. 토론도 마찬가지다. 세미나에서 어쩌다 한국인 학생이 발언하면 교수가 몸을 30도 각도로 기울이며 바짝 긴장하는 수가 있다. 무슨 소리를 하나 알아듣기 위해서다. 말은 서툴지만 발언 요지가 왜 없겠는가. 그럴 때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미스터 김이 한 말은,” 하고 발언의 핵심을 다시 유창하게 요약해서 중계방송 해주는 수도 있다. 그런 교수를 만난 유학생은 행복하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의 소위 그 ‘3대 특징’이 전혀 터무니없는 평가냐면, 그렇지 않다.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 대학 강의실에서도 그 세 가지 특징들은 여지없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강의실에 올 때는 질문을 들고 와라, 대학생은 질문 생산자다, 질문이 없으면 공부도 없다, 이런 식으로 교수들은 질문을 권고하고 유도한다. 강의 시작하기 전에 질문지부터 제출하게 하는 수도 있다. 학생들의 머릿속에 질문이 있어야 강의도 되고 토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빠른 성과로 보답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한 학기 내내 “질문하라”는 주문이 연거푸 떨어지지만 그때마다 학생들은 시선을 내려 깔면서 시무룩해진다. 그러다가 교수 자신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이 시무룩의 이유는 무엇인가? 가감 없는 실화 한 토막--한 번은 어떤 교수가 휴게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는데 학생 몇이 한쪽에 몰려서서 저희들끼리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교수님이 자꾸 질문하라, 질문하라 그러는데 뭘 알아야 질문하지.” 그날 이후 그 “뭘 알아야 질문하지”는 그 교수에게 크나큰 화두가 된다. 정말 뭘 알아야 질문하는가? 그러다가 그는 학생들에게 질문하는 법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마침내 깨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질문하는 법? 질문하는 법은 고장 난 똥차 고치는 법, 피씨 프로그램 까는 법, 감자 수제비 뜨는 법과는 좀 다르다. 그것은 ‘어떻게’에 매달리는 방법지(know-how)의 기술이기보다는 묻는 행위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적 습관에 더 가깝다. 반드시 뭘 알아야 질문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질문이 많은 것은 궁금한 것이 많아서이지 뭘 많이 알아서가 아니다. 궁금한 것을 질문으로 표출하는 정신의 습관을 유지하기, 거기서 질문이 나오고 질문의 능력이 자란다. 한국 대학생들이 질문하지 않는 것은 중고등학교 6년을 지나는 사이에 질문하는 습관보다는 질문하지 않는 습관에 더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질문의 습관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우리 중등교육은 교육이기보다는 ‘교육의 배반’에 더 가까운 특성들을 갖고 있다. 아이들이 궁금증을 발동하게 하기보다는 “얘들아, 이건 중요해, 시험에 나올 거야”라면서 이른바 ‘족집게’ 교사가, 과외선생이, 쓰레기통 뚜껑 열듯 아이들의 머리뚜껑을 열고 그 ‘중요하다’는 것들을 쏟아 붓는 것이 우리네 중등교육의 장기다. 그 방식의 교육으로부터 스스로 질문하고 발견하는 정신의 즐거운 습관이 자랄 길은 없다.
지난 한 10년 동안 소위 ‘인문학의 위기’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인문학도들에게 가장 많이 제기되는 ‘질문’ 중의 하나는 지금 이 시대에 인문학의 가치와 용도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가 의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장의 시대’다. 시장의 시대에 인문학은 무슨 돈이 되는가, 돈이 안 된다면 인문학의 설 자리는 어딘가--이런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동정과 우려에서 나오는 수도 있고 비아냥거림의 문맥에서 나오는 수도 있다. 하도 자주 듣다보니 인문학이 ‘돈 버는 데’도 중요하다,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는 이러저러하다, 어쩌고 하면서 시장시대의 인문학 옹호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인문학을 사람들의 현실적 삶에 훨씬 더 가까이 접맥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인문학은 인문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인문학 전공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무슨 일을 하건 질문하는 일이 모든 사람들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면 바로 그 질문하기를 정신의 습관으로 길러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의 질문들은 인문학도만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질문의 하나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것이다. 나는 왜 여기 이 자리에 있는가? 한국 신문의 상당수 기자들은 ‘비뚤어진 기사를 쓰기 위해’ 그 자리에 있다. 상당수 정치인은 당리당략을 위해 거기 있고 상당수 교육 종사자들은 틀린 교육을 위해 교단에 서 있다.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이해관계와 공익 사이에서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모든 사람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고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가치다.
도정일/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원문)
'책 속으로 난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진강 사진 보세요 (0) | 2006.09.04 |
---|---|
열정은 으뜸 가는 사고력 (0) | 2006.08.26 |
내일(2006. 8. 17)부터 걷습니다 (0) | 2006.08.16 |
50km 걷기 실패하다(2006. 7. 26) (0) | 2006.08.14 |
반말 (0) | 200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