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위대하다. 복잡한 인생을 몇 마디로 명료하게 정리하니 말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잘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대책 없이 외국들 도피처로 택한 사람들이 가지는 착각도 내게는 없었다. 갑자기 자신에게 숨겨진 마지막 재능이라도 발견한 듯 그들은 살던 삶을 걷어치운다. 무언가에 매달려 보려는 마지막 안간힘. 그렇게 그들은 떠나고 별다른 바탕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요리나 사진 혹은 끝까지 가볼 용기도 끈기도 없으면서 공부에 투신한다. 그러나 정열은 한두 해를 넘어 소진한다. 그들은 마침내 그 모든 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씁쓰름하게 귀국을 위해 빈곤한 짐을 싼다.(최윤, <2마력 자동차의 고독>, <<작가세계>> 2003년 봄, 25쪽)작중화자가 말하는 착각은 특정한 개인의 것을 넘어서 우리 인간 일반이 영위하는 삶의 모습인지 모른다. 늘 경험하듯이 열의를 가지고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한다. 용기도 끈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에서야 오는,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도 한몫한다.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헛된 수고가 된다. 이런 관점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와는 다른 생각도 얼마든지 있다.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그의 삶을 지배한 세 가지 열정을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러셀, 송은경 옮김, <<러셀자서전>>(상), 사회평론, 2003, 13쪽)이라고 정리하고 사랑을 찾았고, "많지는 않으나 약간의 지식을 얻"었다(14쪽)고 자평하고서는 인류에 대한 연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과 지식은 나름대로의 범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날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고통스러운 절규의 메아리들이 내 가슴을 울렸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에게 핍박받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미운 짐이 되어버린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외로움과 궁핍과 고통 가득한 이 세계 전체가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바를 비웃고 있다. 고통이 덜어지기를 갈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나 역시 고통받고 있다.(14쪽)이글이 원래 1967년에 나온 것이니 거의 4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인간의 고통이 크게 줄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멀리 갈 것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고 다친 이라크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된다. 마음대로 다 파괴해 놓고서는 이제 이라크의 돈을 들여 미국의 회사가 복구한다고 한다. 미친 짓이다! 그래서 삶의 보람을 찾기는 힘들어졌고 주어진 것이니 그냥 살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러셀은 이렇게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에서 영위하는 삶을 어떻게 결산했을까?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살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이 내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아 볼 것이다.(14쪽)지금까지의 내 삶을 정리하면 어떻게 될까? 바흐를 좋아하고, 읽고 쓰는 일을 목표로 삼았지만, 귀는 열리지 못했고 내 눈을 거쳐 간 책은 몇 권 안 되며, 제대로 된 글 하나 쓰지 못했다는 결산서가 나올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러셀 편에 서서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세상에는 돈과 힘이 진리가 되고 따라서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 맞서서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빼어난 글을 쓰는 사람, 아름다운 자연과 음악이 있는 한 살아 볼 만하다. 내 삶이 비록 헛수고라고 해도 그들을 보고 듣는 즐거움은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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