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서정주 시 '우중유제(雨中有題)'를 분석한 김우창의 글입니다. 저는 평소에 김우창을 한국 최고의 비평가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학과 사회의 관련성을 다루는 원론적인 글이나 작품을 현실을 이루는 전체성의 측면에서 논의하는 방식은 배울
만합니다.
먼저 서정주의 시 '우중유제'의 전문을 소개하고 이어서 김우창의 깊이 있는 분석을 인용하겠습니다. 음미하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글입니다. 마지막에 제 생각도 간단히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가 김우창의 분석입니다. 저는 그의 글의 성격을 '변증법적인 글쓰기'라고 생각하는데, 처음
생각을 자꾸 발전시켜 나가면서, 좀 어려운 말로 다시 얘기하면, 지양하면서 궁극적으로 삶의 전체를 포괄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이 글에서도 이런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로서도 김우창의 독법에 공감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시의 핵심으로 몰입과 초연의 논리라든지, 삶이 미몽이며 이 미몽에서 깨어남으로써 진실에 이르고 따라서 삶이 완성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내와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계집'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물론 이 시에서는 그녀의 태도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사내처럼 열중하던 일에서 초연하기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만약 사내처럼 초연하지 못했다면 그 '계집'은 김우창의 말을 빌리면 '우습게 보이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한 사람의 깨달음을 부각하려고 보통 사람들의 욕망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편적인 진실에 이르려고 보통 사람들을 무시해도 좋으냐고 물어야 합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이런 해석이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에서 서정주의 보수적인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서정주가 노래하는 초월이 현실의 중요한 문제를 무시하거나 몰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현실의 문제점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는 데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시에서 '계집'의 태도와 반응은 부당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혹시 서정주의 친일이나 전두환의 5공화국을 찬양하는 태도는 이런 문제, 다시 말하면 그 체제에서 고통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결과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가 시 한편을 놓고 너무 거창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으로서의 서정주의 사회적 태도는 이런 방식으로 얘기해야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얘기의 의도도 이런 데 있습니다.
먼저 서정주의 시 '우중유제'의 전문을 소개하고 이어서 김우창의 깊이 있는 분석을 인용하겠습니다. 음미하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글입니다. 마지막에 제 생각도 간단히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에서 우선 주의할 수 있는 것은 일상 언어의 눌변을 그대로 옮겨 온 '그 짓'이라든가 '또그르르 그리로 굴러가버리듯'이라든가, (이것은 사투리의 시적 효과를 살리려는 노력으로 하여 조금 비일상적인) '고로초롬만' 같은 말들 또 일상적 현실을 직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진땀'이나 '계집'과 같은 언어지만, 물론 더욱 기발하면서도 실감나는 것은, 이 시 전체의 비유적인 상황이다.신라의 어느 사내 진땀 흘리며
계집과 수풀에서 그 짓 하고 있다가
떨어지는 홍시에 그만 마음이 쏠려
또그르르 그만 그리로 굴러가버리듯
나도 이젠 고로초롬만 살았으면 싶어라
쏘내기 속 청솔방울
약으로 보고 있다가
어쩌면 고로초롬은 될 법도 해라
신라의 어느 사내 진땀 흘리며에 볼 수 있는 금기 사항의 대담한 제시-그것도 미화하는 것도 아니며 비속화하는 것도 아닌 인간의 성행위의 동물적 실상의 있는 그대로의-그리고 이어서
계집과 수풀에서 그 짓 하고 있다가
떨어지는 홍시에 그만 마음이 쏠려에서의 엉뚱한 이미지의 도입, 이 도입이 가능하게 해 주는 우스개 효과-이러한 것들은 미당선생 특유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효과의 근본적인 가치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일면을 새로운 각도에서 깨닫게 한다는 데 있다.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마음과 몸을 가장 열중하게 하는 일 중의 하나의 성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성행위의 열중도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자기에 몰두하는 데에서 가능해지는 것이지 조금만 이질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 몰두의 환상은 곧 깨어지고 오히려 몰두 그것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것을 '우중유제'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나머지 부분이 계속 발전시켜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것은 비단 성행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심각해 뵈는 인간의 경영도, 우리가 거기에 열중되어 있는 한에만 전부인 듯이 보이지 그것이 곧 전면 진실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즉, 우리가 흔히 갖는 전면 진실의 환상은 극히 조그맣고 엉뚱한 이질적인 요소에 의해서도 금방 깨어져 버릴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전면 진실의 환상은 오히려 우습게 보이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경영에 해당되는 것일 뿐 아니라 인생 그것에도 해당된다. 그때 그때의 인생의 열중에서 보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조금만 달리 보면 사람은 삶의 열중으로부터 또는 삶 그것으로부터, 굴러 떨어지는 홍시 따라가듯 빠져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대개 이와 같은 몰입과 초연의 논리의 예증이 '우중유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주제와의 관련에서 비로소 이 시에 쓰인 언어, 가령 '사내' '진땀' 계집' '그 짓'과 같은 말이 갖고 있는 약간, 경멸적인 거리감도 정당화된다.
또그르르 그만 그리로 굴러가버리듯
'우중유제'의 의미는 이러한 분석으로 소진되지 아니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한 의미의 함축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시의 기본이 되는 비유적 상황인 성행위는 단순히 몰입과 초연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명제의 한 사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성은 삶의 바로 한복판에 자리잡은 생명작용이다. 위에서 우리는 떨어져 굴러가는 홍시의 비유가 성에 대조되는 사건처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대조적인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홍시가 식물의 생식작용의 마지막 열매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여야 한다. 생물체의 생식행위는 홍시의 경우에 분명한 것처럼, 비록 그것이 개체의 타는 듯한 열중으로 표현되지만, 결국은 종족보존의 숨은 계획의 개체적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의 성충동 내지 생명충동은 어떤 개체의 관점에서는 절대적인 실존의 원리이지만, 이것은 종족적 생명의 연면한 이음 가운데에서 하나의 짤막한 삽화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의 열중 또는 삶의 몰입으로부터 깨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거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삶의 과정을 완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하나의 미몽이며 이 미몽에서 깨어남으로써 사람은 진실에 이르며 또 그렇게 하여 삶이 완성된다는 생각-이런 생각이 '우중유제'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이상학적 허무주의에로 나아가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이미 우리가 삶의 미몽에서 깨어날 때, 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생명활동에 들어간다는 생각 속에 부정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여튼, 삶이 미몽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미몽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중유제'의 역사에 대한 언급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이 시에서 기본적인 상황이 신라시대로 설정되고 이것이 다시 오늘날의 상황에 대조되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 시의 첫부분에서는 신라의 사내가 진땀을 흘리며 성행위를 하다가 홍시를 보고 있는데 둘째 부분에서 시인은 소나기 쏟아지는 가운데에 청솔 방울을 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람 사는 일은 진땀을 흘린다거나 소나기를 맞는다거나. 궂은 것이 없을 수 없고 힘이 안 들을 수가 없는 일이란 점에서, 또 이것이 보다 큰 생식과 결실의 리듬 속에 일어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은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좋아서 진땀을 흘리는 일과 소나기를 맞는 일, 홍시와 같은 풍요한 열매를 보는 것과 불리한 여건에서 버틸 수 있는 소나무의 강인성을 상징하는 그러면서 별 쓸모없는 솔방울을 쳐다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소나무의 강인성과 그 단단한 결실에의 의지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삶에서 삶의 교훈이 주로 행복과 보람으로보다는 '약'으로서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1977, 223-6쪽)
저로서도 김우창의 독법에 공감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시의 핵심으로 몰입과 초연의 논리라든지, 삶이 미몽이며 이 미몽에서 깨어남으로써 진실에 이르고 따라서 삶이 완성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내와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계집'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물론 이 시에서는 그녀의 태도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사내처럼 열중하던 일에서 초연하기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만약 사내처럼 초연하지 못했다면 그 '계집'은 김우창의 말을 빌리면 '우습게 보이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한 사람의 깨달음을 부각하려고 보통 사람들의 욕망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편적인 진실에 이르려고 보통 사람들을 무시해도 좋으냐고 물어야 합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이런 해석이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에서 서정주의 보수적인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서정주가 노래하는 초월이 현실의 중요한 문제를 무시하거나 몰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현실의 문제점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는 데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시에서 '계집'의 태도와 반응은 부당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혹시 서정주의 친일이나 전두환의 5공화국을 찬양하는 태도는 이런 문제, 다시 말하면 그 체제에서 고통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결과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가 시 한편을 놓고 너무 거창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으로서의 서정주의 사회적 태도는 이런 방식으로 얘기해야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얘기의 의도도 이런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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