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두 분의 신부님

귤밭1 2005. 1. 29. 20:15
요즘은 신문 읽기가 겁납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냐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하는 기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물애기'(아주 어린 젖먹이를 뜻하는 제주도 말입니다. 살리면 좋을 같아서 써 봤습니다. 참고로 오이는 제주도말로 물외(사전에도 올라 있네요)입니다. 참외와 대비되는 말이지요)의 엄마를 죽이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하고 하는, 소설보다 더 복잡한 내용의 기사는 우리를 충분히 절망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피에르 신부님 같은 분도 계시기 때문일 거예요. 읽어 드릴게요.

어느 날 나는 한 부인이 세 아이와 할아버지 한 분, 그리고 두명의 남편과 함께 오는 걸 보았다. 그들은 불법으로 살고 있던 빈 집에서 막 쫓겨났노라고 내게 설명했다. 임시로 나는 유스 호스텔로 개조한 뇌이-플레장스의 내 집에 그들을 머물게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때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숙소는 독일인, 프랑스인, 영국인들로 만원이었다. 그 가족에게 내어줄 자리가 없었다. 달리 도리가 없기에 나는 예배실의 예수님상을 들어내 다락 한쪽으로 치우고, 그곳에 그 기이한 가족의 거처를 마련했다.

때때로 나는 노숙자들을 위한 우리의 투쟁이 이처럼 널리 발전하게 된 것이 우리 집에 계시던 예수께서 맨 먼저 당신의 자리를 집 없는 가족에게 내놓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피에르 신부, 백선희 옮김, <<단순한 기쁨>>, 마음산책, 2001, 35쪽)
멋진 신부님입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섰던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는 이런 이를 보면 무언가를 믿고 싶어집니다.

또 한 분의 신부님은 현실의 존재가 아닙니다. 공지영의 소설에 등장합니다. 역시 아주 멋진 분이므로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신학생 때 한번은 그 분(주교, 제가 소개하려는 바로 그 신부님입니다-인용자)이 우리 몇몇을 부르셨지. 술을 사주고 싶은데 조용한 데가 좋으냐, 시끄러운 데가 좋으냐? 그때는 그분이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이셨는데 신학생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잔뜩 긴장할 수밖에...... 그래 대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럼 조용한 데 갔다가 시끄러운 데를 가볼까, 하셨어. 그분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젊은 여자 둘이 써빙을 하는 카페였어. 맥주를 시켜놓고 써빙을 하는 짧은 치마의 여자들을 바라보면서 그 신부님 말씀하셨지. 저애들 참 이쁘지 않냐? 젊고 참 이쁘지? 그런데 니들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게냐? 왜 그렇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굳어 있냐? 이쁜 건 좋은 거야. 이쁜 건 이쁘다고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고 할 줄 알아야 좋은 신부가 되는 거야...... 신학교에 계신 다른 신부님이 보았으면 징계감인 일을 그분은 우리들에게 하신 거야. 그러고는 노래방으로 우리를 데려가셨지. 이번에는 시끄러운 데 갈 차례였으니까. 그분은 마이크를 들고 '사랑해!'라는 노래를 열창하셨어. 왜, 아나? 한국에 이런 노래가 있거든.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아름답고 자연스러웠지, 자연스러워서 아름다웠고...... 자유로워 보였어.

그런데 한달 전쯤 그분이 돌아가셨어. 설암이셨는데 (중략). 아는 수녀님이 어제 전화를 하셨는데...... 그때 이야기를 하시더구나. 돌아가시기 전 그렇게 우셨대. 칠십이 넘은 노인네가 간호해주시는 늙은 간호사 수녀님의 손을 붙들고 그렇게나 많이 우셨다는 거야. 아기처럼, 두려움에 가득 찬 아기처럼.....(공지영, <열쇠>, <<별들의 들판>>, 창비, 2004, 145-6쪽)
종교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습니다만 대체로 종교는 욕망의 제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 같은 데서는 욕망을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누리자면 욕망을 통제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니까 당연합니다. 이 자유야말로 위대한 영혼이 추구하는 경집니다. 간디 같은 이는 발가벗은 채 역시 그렇게 한 젊은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면서도 마음이 들뜨지 않아야 된다고 하면서 실연하기도 했다지요. 유치하게 굳이 그럴 것까지야 뭐 있냐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얘기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는 조금 짐작이 가기는 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우리 주교님도 그런 자유로운 경지를 추구하는 분이었나 봅니다. 욕망의 존재는 물론이고 그 자연스러운 발산까지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수도나 진리의 길이 뚫린다는 거지요. 보통의 연약하고 굳은 정신은 엄연히 존재하는 욕망을 무시하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굽니다. 뭘 하지 말라는 말만 늘어 놓지요. 그러니 욕망에 넘어가기 쉬운 보통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있게 들릴 수가 없지요.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일수록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기가 쉬운 것은 참 역설적인 현상입니다. 멀리갈 것도 없이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목사님네들의 도대체 신앙인 같지 않은 행태를 떠올리면 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틀림없이 이런 이들을 가장 먼저 혼내실 거예요.

그런데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것 같은 주교님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울다니요! 나도 울 뻔했습니다. 그분은 죽음이 두려워서 그랬지만 나는 우리 주교님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해서 그랬습니다. 이분의 말을 따라 하면 두려운 것은 두려운 거지요. 그래서 자신의 처지-아마 제삼자나 신도들이 상상하는, 다시 말하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많이 다른 그런 것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요? 우리는 얼마나 많이 남의 눈을 의식하고 거기에 맞춰 사는 것인지요!-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마음이 흐르는 대로 간 거지요. 그런 점에서 '아기처럼'이라는 말은 그럴 듯한 데가 있습니다. 아무튼 거의 일생에 거쳐서 생각했을 죽음에 대해서 초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벌거벗은 진실입니다.

종교도 마음의 단련도 이런 궁극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야 조금 그럴 듯한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일 뿐더러 그것을 초월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솔직하고 겸허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자신의 비루한 욕망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부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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