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벌이는 황홀한 색깔의 잔치를 보노라면 아름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식물로 치면 새싹인 어린이가 자라나는 모습도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아기가 기분이 좋아 그야말로 온몸으로 활짝 웃는 것을 보는 어른은 행복의 실체를 손에 잡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젊은이도 아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50대의 내 눈에 우리 대학생들은 샘날 정도로 찬란하다. 아마 내 젊음도 그랬을 게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무렇지 않게 그냥 흘려보내고만 것이 아주 소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깨달음은 안타깝게도 늘 늦게 온다. 다시 아기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떤 나이 든 작가는 아기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천재에 비기고 있다.
아기는 식구들과 동네 사람뿐 아니라 꽃과 나무와 멍멍이도 좋아했다. 아기가 좋은 것을 보고 온몸으로 좋아한다는 감정 표현을 할 때 인간이 행복이라 부르는 것의 원형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아기가 천재라고 생각했다. 좋은 것을 향한 감수성이 활짝 열린 아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박완서,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 2004, 244-5쪽)우리는 천재 하면 아마 거의 다 자동적으로 공부에 관련된 방면만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여기 엄마는 아이가 온몸으로 행복을 느끼고 드러내는 것을 두고 천재라고 부르고 있다. 신선하다. 우리는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거꾸로, 되도록 감정을 제어하고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할 때는 감정적으로 나가기가 일쑤다). 정직성이라는 덕목은 윤리적인 측면에는 물론이고 대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에도 꼭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무의식적인 습관이나 지나치게 점잔을 빼는 문화적 분위기의 힘에 눌려 감정 자체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쟁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얘기를 좀 돌려서, 나도 저 아기와 같이 천재인 것만 같다. 좋은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 한다. 특히 맛있는 밥 같은 것을 앞에 두고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그런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일상의 일에 심드렁해 하거나 심지어는 시큰둥하게 반응하여 그런 일에 대해 한참 재미나게 얘기하는 사람들을 열없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이는 분명 둔재이다. 우리 삶이란 게 별것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보석인 수가 많다. 우리 눈이 잘못되어 그런 것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뿐이다. 눈을 크게 뜰 일이다.
우리도 이제는 꼭 공부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천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된다면 사람마다 나름대로 다 천재인데 그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라나 사회는 그런 능력이 한껏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렇게 가치의 다양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사람다운 삶이 가능해진다. 최고의 가치가 하나만 있다면 우리 삶은 필연적으로 획일화되고 무미건조해진다(나는 그래서 서울대학교를 없애거나 그렇지 않으면 순수 학문 분야만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노대통령이 서울대를 없애자고 한 것-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을 두고 대학 나오지 못한 학력 컴플렉스를 드러냈다면서 다음 대통령은 대학 졸업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관련 기사), 내게는 '대졸자 대통령론'도 문제지만 그보다 서울대 폐교론을 가지고 무슨 콤플렉스 운운하는 그녀의 단순성이 참 슬프게 다가왔다.). 이와는 정반대로 여러 가지 꽃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어울려 피어 있는 꽃밭을 상상해 보자. 나는 이런 데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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