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윤동주의 <서시>의 '바람' 읽기

귤밭1 2005. 2. 1. 10:12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정확히 말하면 잘 안다고 여기는 윤동주의 <서시>를 읽어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크게 막히는 곳 없이 술술 잘 읽힌다. 얼른 보면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특히 1연의 '바람'과 2연의 '바람'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해석하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은 것이다. 앞에서는 바람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는데 뒤에서는 앞과는 아주 다르게 긍정하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읽지 못할 것은 없다. 그렇게 되면 이 시는 젊은 이상주의자의 신념을 표명한 것일 뿐이고 시로서는 그다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1연과 2연이 단순한 나열로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람을 보는 '나'의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시를 따라가면서 이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행에 나오는 '하늘'은 바람직한 것을 뜻하는 원형(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비슷한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형이라고 한다)적인 상징이다. 높은 데는 오르기가 쉽지 않다.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 있는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것을 상징하게 된다.

육체상으로는 모든 사람은 중력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상향 작용은 하향 작용보다 늘 더 어렵기 마련이다. 그래서 상향 운동은 성취의 개념으로 연상되며, 드높음이나 상승의 의미를 지니는 여러 이미지들이 탁월함과 왕권·지배 등의 개념을 흔히 연상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누구에게나 <애써 올라가려고 노력한다>고 하면 자연스러우나 <애써 내려가려고 노력한다>고 하면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왕은 신하들을 그 <위>에서 다스리지(rules 'over') 그 <아래>에서 다스리지는 않는다. 어려움을 <극복하고>('surmounting') 유혹을 그 <위에서>에서 이기지(triumph 'over') 그 <아래에서> 이기지 못한다. 나는 새, 공중에 쏘아 올린 화살, 별·산·돌기둥, 자라는 나무, 드높은 탑 등 위로 향하는 개념과 경험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여러 이미지들은(기타 어떤 다른 의미가 이들 가운데 어느 것에 부가됐다 해도) 도달해야 될 대상, 획득하고자 하는 소망,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선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필립 윌라이트, 김태옥 역, <<은유와 실재>>, 문학과지성사, 1982, 114-5쪽.)
서정적 자아('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드높은 이상을 철저하게 추구하고자 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니 얼마나 약한 것인가! 그러니까 조금의 흔들림도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는 마음을 흔드는 것이 바람이다. 그러니까 바람은 현실적으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일상적인 욕망일 것이다.

5행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야말로 서정적 자아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다. 쉽게 그냥 시인이 되고 싶은 게 꿈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길'이라고 했으니 꿈을 이루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읽을 수 있겠다. 아주 미세한 흔들림에 괴로워하며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운명애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삶을 어떻게 봐야 할까? 충분히 고결하고 칭찬할 만한 것이라고 해도 어딘가 유연성이 모자라고 포용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얼른 생각하기에, 기계적일 뿐더러 참으로 우러러볼 만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은 아마도 일상적인 소박한 삶을 근본적으로 배척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일 게다. 세상의 일을 어떤 영역으로 나누어 놓고 어떤 것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기는 어렵다. 당연하게 그런 사람은 쉽게 부러지기도 한다. 세상의 일 자체가 그렇게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조건을 감안하고서 이상을 얘기할 때라야만 그 이상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주위의 사람들과 같이 고민해 볼 수 있다. 대체로 큰 이상일수록 내 혼자만의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위의 얘기는 둘째 연을 해석하기 위하여 해 본 것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밤에도 여전히 나를 흔드는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도 내 주위에서 부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데서 별을 스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저 드높은 이상(별)이 흔들림(바람)을 조용하게 수용하고 있고 서정적 자아는 이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숙한 태도에 이른 것이다. 이상도 현실의 조건을 제대로 고려할 때라야만 모든 사람이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된다면 내 흔들림이나 사소한 욕망은 일방적으로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상을 이루는 데 감안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가 읽을 만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바람을 받아들이는 자아의 태도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보고 순수하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닌가고 한다면 자신있게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타락한 세상에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따라서 같이 더러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점도 감안해 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어떤 이론가가 소설에 대해,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시를 읽는 데 적용해도 크게 그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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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 사랑방에 올린 <슬픔에 대하여>의 일부를 조금 손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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