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생, 특히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을 자녀로 둔 어머니에게, 억지로 공부하게 하면서 아이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우리나라는 아이들에게는 정말이지 공부 지옥이다. 하기 싫은 걸 밤 늦도록 해야 하니 이게 지옥이 아니고 뭔가!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지옥에서 살다가 그곳을 벗어나서 정작 대학에 오면 공부와는 담을 쌓게 된다. 자유가 주어지자 억지로 마지못해 하던 그 지겨운 공부에는 등을 돌리는 것이다. 당연하다. 물론 취직이라든지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지만 이것은 대학 들어오기 전에 실컷 경험한, 따라서 피하고만 싶은 지옥의 연장일 뿐이다. 요컨대 즐겁게 하는 공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 가운데 좀 급한 이의 입에서는 '에이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지 모르겠다. 참을 필요 없다. 신문을 보면 좋은 일이 하나도 없는데 이 참에 기분도 풀 겸 해서 소리 높여 욕해도 좋다. 장관도 국민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데(관련 기사. 참고로, 이에 대한 김선우 시인의 생각은 여기를 보세요) 우리라고 못할 것은 없다.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헤아려 대신해 보겠다.
** ***! 혼자 잘난 척하지 말아라. 누가 그러고 싶어서 밤 늦게까지 학원 보내는 줄 아는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좋은 대학도 못 들어가고 번듯한 직장도 못 잡고 잘 살지도 못하니까 그렇지. 공부 안 시키고 놀렸다가 좋은 대학 못 들어가면 네가 책임질래? 정말 *같네'(*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내가 술 먹으면 친한 이 앞에서는 하는 말이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그 말을 듣고도 깔깔거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내가 소심해서, 화를 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꾸까지 못할 것은 없다. 전에 쓴 글로 대답하는 것이 좋겠다.
제발 생각을 바꾸자. 책임은 아이가 진다. 왜 우리 부모들이 주제넘게 아이의 장래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제 삶의 주인인 아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지. 우리는 우리 집의 사정에 따라서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기만 하면 된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웃이 불쌍하게 산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마음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밥을 거르거나 잠을 안 자거나 하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식들도 이렇게 이웃처럼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 부모가 행복해진다. 덩달아서 아이는 제 삶의 주인이 되는 거고.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다. 못난 가족주의를 좀 벗어나 보자.
이렇게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놀지 않고 학원 열심히 다녀서 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니지만 많이 양보해서 그렇게 된다고 치자. 좋은 대학 나와서 그럴듯한 직장에 다녀야 되는 것인가? 그런 데 다닌다고 행복할까? 나는 사람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성실하기만 하면 억지로 공부하지 않고서도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아이를 놀리자> 전문)
우리가 여유를 갖고 긴 눈으로 보면 수긍하지 못할 것도 없다. 좋은 직장 들어가 다른 사람보다 돈 많이 받는 게 그리 대순가! 우리가 보기에는, 돈이 많아서 아무 걱정없이 살 것 같은 사람도 심지어는 목숨을 끊기까지 한다. 뭐, 이런 것은 극단적인 예여서 썩 좋은 반박이 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물질적인 조건이 갖춰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돈이 는다고 해도 행복이 같이 증진되지 않는다는 전문가의 의견(여기를 보세요)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저 원수 같은 공부 대신에 즐거움을 강조하고 싶다. 즐거워야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즐거움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표여야 한다. 그런데 최고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 다른 말로 하면 외부적인 목적이 없는 채로 좋아하는 것이다. 놀이를 생각하면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할 수 있다. 구슬 많이 모아 부자 되기 위해서 구슬치기 놀이하는 아이 본 적이 있는가! 없다. 그냥 구슬치기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얼른 보면) 쓸데없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는 게 놀이다.
문학이나 예술은 이 놀이와 가까운 측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래서 칸트 같은 철학자는 예술을 놀이로 봤다. 나는 문학, 예술을 놀이와 전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에는 반대하지만 놀이의 요소를 무시하는 주장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말놀이의 요소가 없는 시나 소설을 좋은 작품으로 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독자를 말 자체에 주목하도록 만들지 못하는 시는 문학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말이 왜 이 시에서 나오는지를 따지는 과정에서 누리는 기쁨을 주지 못하는 시를 왜 읽어야 할까? 문학이 할 수 있는 다른 기능은 문학과는 다른 종류의 글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이의 측면을 문학이나 예술에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는 일-놀이와 반대되는 것이다-도 얼마든지 놀이로 탈바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지겨운 공부를 예로 드는 것이 좋겠다. 아이들은 호기심 덩어리다. 자꾸 묻는다. 이게 공부의 뿌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호기심을 갖고 대답을 찾는 데 인간은 즐거움을 느낀다. 많이 알아서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그냥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참으로 슬프게도 이 본능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다. 공부 그 자체를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런 것은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맞다고 해 두자.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앞에서 놀이를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얼른 보면)이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아무 이유 없이 괄호를 쓴 것은 아니다. 잘 보면 잘 놀아야 제대로 인간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즐겁게 놀아야 몸도 튼튼해질뿐더러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있다.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영국의 속담은 귀담아들어야 할 진리다! 공부도 그렇다. 좋아서 공부하면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더 나아가서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취직하고서 자기 일을 보란 듯이 잘할 수 있다. 그러니 잘 나가는 회사, 조직을 만들려면 높은 시험 점수 무시하고 즐겁게 공부한 사람을 뽑을 궁리를 해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하자면, 우리나라가 순수자연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자면 공부 자체가 좋아서 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것은 공부는 즐겁게 할 수 있는 수많은 것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우리의 비극은, 이와는 정반대로 공부만 최고의 가치로 아는 데 있다. 제대로 공부도 안 하면서 말이다.). 세상에는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제(2008. 10. 31) 재미있게 읽은 것을 예로 들면, 요리는 어떤가? 여기에 소개된 주방장을 만나 보자. 아마 저절로 즐거워졌을 것이다.
저렇게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 좋은 재료를 고르고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좋은 음식을 하면 누구에게 나눠주고 싶다! 자랑도 자랑이지만 같이 맛 보는 즐거움이 더 큰 까닭이겠다.) 데 즐거움을 느끼는 게 공부 잘하는 것보다 못할 게 뭐가 있는가? 아니, 주세페 주방장의 요리야말로 진짜 공부 아닌가!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 따라서 할 일이 많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걸 알려 주자.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멋쟁이로 살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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