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님 영전에, 우리 한국 최고의 작품 <<토지>>에 대해서 쓴 두 편의 글을 바칩니다. 마땅히 새로이 써야 하나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오래 전에 쓴 글을 올리니 한국의 산천을 사랑하는 그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소서.
"임자."
"야."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이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입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박경리, <<토지>> 2부 5편 8장)
<<토지>>에서 가장 애처로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을 들라면 자연스럽게 용이와 월선이를 떠올리게 된다. 월선이가 무당의 딸이라는 신분상의 이유로 그들은 결혼하지 못한 채 서로를 애타게 사랑한다. 키가 크고 훤칠하게 잘생긴 농민 용이는 마음에도 없는 강청댁과 결혼하지만 그녀를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대접할 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아기를 못 낳는 강청댁은 남편이 월선이에게 마음이 가 있다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질투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무서운 전염병인 호열자로 강청댁이 죽고 나자, 용이는 이 <<토지>> 전체의 주인공인 최서희의 아버지 살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칠성이의 아내 임이네-이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용이에게 노골적으로 유혹의 눈길을 보내곤 했다-를 불쌍히 여긴 나머지 관계를 맺게 되고 부부로 같이 살게 된다. 임이네는 생명력이 지나쳐 차츰 탐욕의 화신이 되는 사람이다.
한편 월선이는 용이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가 장가를 가자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절름발이인 늙은 남자의 아내가 되지만 견디지 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용이와의 관계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직 그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최서희 집안이 망하는 과정에서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용이네는 간도로 이주하게 된다. 떠돌이 비슷하게 된 용이와 임이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태어난 홍이는, 삼촌의 도움으로 국밥집을 차린 월선에게 얹혀살게 된다. 할 일이 없게 된 임이네는 그녀의 천성적인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돈을 모으는 일에 전념하게 되고 국밥집에 들어온 돈도 몰래 자기의 것으로 삼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용이는 용이대로 여자에게 의지하여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사실은 이 자존심은 간도에 와서 새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능력이 없는 주제에 두 여자를 거느린다는 자격지심이 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임이네의 탐욕과 자존심의 상처를 견딜 수 없어서 홍이를 월선에게 맡기고 임이네와 둘이 통포슬로 농사를 지으러 떠난다. 물론 월선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월선이가 죽을 병에 걸렸다. 용이는 농사일을 끝내고 겨울 산판에 일하러 가 있다. 월선이가 아프다는 연락이 자꾸 오고 심지어는 아들 홍이가 직접 와서 월선이가 다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전하지만 용이는 적어도 겉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면서도, 따라서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도 끝까지 견디는 용이의 금욕주의는 나 같은 사람의 글 재주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전할 수 없으니 느끼려면 작품을 직접 읽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내 무능력이 몹시 안타깝고 슬프다.
산판 일을 다 마치고 월선이가 죽기 직전에 용이가 찾아와서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바로 위의 구절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한이 많은 사람들이다. 아마 월선이 쪽이 더했을 것이다.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이 압축되어 손에 잡힐 듯한 상태로 뭉친 것이 한이다. 그래서 한이 맺힌다고 한다. 한은 무겁다.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한을 품은 사람을 밑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몸이 무거우니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런데 월선이는 새털같이 가볍다. 왜? 아프니까 살이 빠져서? 그럴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욕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볍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남은 한(여한)이 없는 것이다. 욕망을 초월한 사랑은 '새털같이' 가볍게 비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월선이는 육체적으로는 병들어 무력하고 곧 죽게 되겠지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위엄을 지닌 인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비극이나 그 주인공이 유발하는 카타르시스의 비밀이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건드리는 것은 감동을 주게 되어 있다.
깊디깊은 사랑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임이네의 처지에서 보면 어떨까? 용이와 월선의 사랑의 정신적인 깊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임이네의 물질적인 탐욕이 정도 이상으로 부각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나치게 운명론의 시각으로 인물들을 조명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용이, 월선이, 임이네 모두 시간이 흐르는 데 따라 늙고 죽어가기는 하지만 성격상의 본질적인 변화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운명이 정해 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한을 놓고, 용이와 월선의 경우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마음속에서 삭이는 차원을 강조하면서, 외부적으로 발산하여 그 한을 만들어낸 원인을 제거하는 측면이 상대적으로 모자란 것도 이해가 된다. 근본적으로 운명론에 기반을 두고 인간의 삶을 파악하고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괴로울 때마다 <<토지>>의 아무 데나 펼쳐서 읽곤 하지만, 1, 2부를 읽는 지난 며칠 동안은 눈물을 많이 흘렸고 한숨도 꽤나 쉬었다. 그래서 아마 내 무거운 영혼도 조금은 가벼워졌으리라! 이른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이다. 꼭 읽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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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수는 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나를 알아주던 단 한 사람이었네."(박경리, <<토지>> 13, 5부 1권, 솔, 1993, 206쪽) 동병상련의 처지였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은 먼저 최서희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은 처지입니다. 병수는 꼽추로 서희를 마음속으로는 몹시 좋아하지만 아버지 조준구와 어머니 홍씨가 병수와 서희를 혼인시키고 재산을 가로채려는 계획을 알자 그렇게 되면 죽어 버리겠다고 합니다. 길상도 그 여자와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미천한 신분에서 말미암은 복잡한 심리 사이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갈등을 겪은 바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부를 가장 좋아하는데 위의 글에서 서툴게 얘기한, 용이와 월선이의 도저한 사랑도 그렇거니와 서희와 길상 사이의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랑을 둘러싼 내면적인 투쟁이라고나 해야 할 양상이 감동적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인간이라는 게 참으로 복잡한 존재구나 하는 점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럴 때 소설가는 신의 자리에 가까이 가 있는 경이로운 존재가 됩니다.
옆길로 새고 말았네요. 또 둘은 예술가라는 점에서 꼭 닮았습니다. 길상은 관음탱화를 완성합니다. 병수는 소목으로서 목공예의 장인입니다. 이들이 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얘기한 신분이나 불구의 몸에서 오는 괴로움과 절망을 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구자로서의 번민이나 부모가 자식에게 가한 수모, 천지간에 맘도 몸도 기댈 수 없었던 처절한 고독, 그것은 병수 자신을 위한 목마름이었지만 그 목마름 같은 것을 누르고도 남을 크나큰 고통은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부모의 큰 죄는 바로 자신의 죄요 부모의 악업으로 얻은 재물로 자신이 연명되고 있다는 그 뼈를 깎는 고통은 더러운 곡식을 아니 먹으려고 수없이 기도했던 자살, 그러나 생명에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포기하였고 더러운 물 더러운 곡기를 미친 듯 빨아당기지 아니했던가. 병수는 죽지 못하는 치욕 때문에 미쳐 날뛰었다. 그를 구원한 것이 바로 이 소목일이었다. 이제 병수는 용서를 받은 것이다. 자학은 일(예술)에서 승화되었다. 일은 그에게 있어서 만남이었다.(<<토지>> 9, 3부 3권, 삼성출판사, 1979, 296-7쪽)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조건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작가도 고통을 창조적인 일로 탈바꿈시켰다는 점에서 이들과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보노라면 위대한 예술은 고통이 없이는 나올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프로이트 말마따나 예술은 욕망의 직접적인 충족을 유예한 대가로 주어지는 고통의 산물입니다.
또 이미 앞에서 말해 버렸습니다만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선천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같습니다. 길상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최참판댁의 종으로 지냈고, 병수는 꼽추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한을 삭이며 살아온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맑은 심성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조병수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어린이같이 천진무구하며, 할아버지인 길상도 소년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럴 수 있는 것은 슬픔과 외로움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는 점을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인간은 절대로 막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준구가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병수는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묵묵히 감수합니다. 구제받지 못하여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자, 육체를 안고 버둥거리는 생명에 대한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길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우고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길상의 큰아들 환국이 길상이 그린 관음상을 보고 지감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볼까요.
"아버지는 참 외로운 분 같습니다."슬픔의 눈물은 우리 영혼을 맑게 씻어 줍니다. 외로움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도록 하지요. 이들을 만나면 우리도 저절로 깨끗해진 영혼을 갖게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좋은 작품은 영원한 축복입니다.
환국이 말문을 열었다.
"관음상을 본 감상인가?"
"네."
"자네 말이 맞네. 원력(願力)을 걸지 않고는 그같이 그릴 수는 없지.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이라면 슬픔과 외로움 아니겠나?"(<<토지>> 13, 솔,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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