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첫눈이 오면 마음이 설레는 까닭

귤밭1 2008. 11. 29. 15:05

훈이네 집 '흔적 남기기' 게시판에 '왜 첫눈이 오면 설렐까?"라고 묻고 나서, 일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의 이해> 수업 시간에 이 질문을 던져 보았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이런 물음에 익숙지 않은 탓이리라. 그런데 내 생각에는 교실에서 이런 질문이 오가야 수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시간이 될 것 같다. 문학 수업이라면 더 그렇고. 우리 교육이 (백과사전 찾으면 나오는) 지식을 외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첫 경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는데 내가 점수를 매긴다면 만점을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여러 말 필요없이 첫 경험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레기는커녕 다시는 보고도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경험에다 그 내용이 긍정적인 요소로 채워진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아야 할 것 같다. 

 

눈이 하얗다는 사실도 설레게 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눈이 오면 세상이 하얘진다. 우리 마음도 덩달아 밝고 깨끗해진다. 일시나마 우리는 마음이 정화되어 우리의 영혼이 고양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 이상의 존재가 된 것만 같아 뿌듯해진다. 곧 눈이 녹아 원래의 세상대로 돌아온다고 해도 짧은 시간에 맛봤던 정화의 느낌은 우리 영혼에 깊이 각인될 것만 같다. 그래서 눈이 오면 우리 마음은 한없이 설렌다.

 

또 있다. 그런데 나는 첫눈은 무조건 함박눈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게는 싸라기눈이나 진눈깨비는 첫눈이 아니다.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억지를 부린다고 누가 반박하면, 첫눈이기는 하되 사람을 설레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고 내 억지를 조금 누그러뜨릴 마음은 있다.

 

그러면 함박눈이 내리는 모양을 상상해 보자(이렇게 쓰고 있으니 밖에는 눈이 펄펄 내리는 것만 같다!). 눈송이들이 떼로 모여 가볍게 춤을 추고 있다고 해서 아무도 내게 억지를 부린다고는 못할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나는 바로 여기에 우리 마음이 즐거워지는 비밀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괜히 즐거우니까라든지 즐거운 기억을 환기시켜서 설렌다고 하는 대꾸가 있는데 그 자체로는 백번 맞는 말이지만 앞의 것은 왜 즐거운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고 뒤의 것은 첫눈 자체보다는 추억에 초점이 가 있어서 충분한 대답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대표적인 놀이가 춤이거나 뛰어다니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놀이는 아무 목표 없이 그냥 즐거워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다가 부모에게 욕을 얻어들은 경험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모양이 바로 저 놀이, 어린 시절에 많이 했던 저 놀이와 아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계절에 관계없이 놀아 본 적이 있기만 하다면 첫눈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눈의 춤은 우리를 목적을 가진 일(놀이의 반대가 일이다)에서 해방시켜 줄뿐더러 놀기 좋아했던 순수한 어린 시절로 데려다 준다. 과거로 돌아가는 데는 하얀 색도 한몫 단단히 할 것이다. 때를 벗겨내면 하얀 바탕이 나오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어린 시절과 하얀 색은 친한 사이이다!

 

위에서 '가볍게'라는 말을 썼는데, 눈의 가벼운 이미지에도 밑줄을 그어 강조해야겠다. 즐거워지려면 마음을 놓아야 한다. 집착하거나 걱정거리가 있으면 절대로 웃지 못하고 따라서 즐거울 수가 없다. 그래서 무거우니까 밑으로만 내려가게 되고 나중에는 고이고 썩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마음을 푹 놓으면 우리 몸도 덩달아 가벼워져서 저 함박눈처럼 공중으로 치솟을 수 있게 된다. 마음도 몸도 춤을 출 수 있다. 저 함박눈의 가벼운 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이 이미지의 작용이 첫눈을 맞이하는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이다. 사전에서 '설레다'를 찾아보면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리다.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자꾸 움직이다. 물 따위가 설설 끓거나 일렁거리다"라고 뜻을 풀이하고 있다. 다 움직임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런데 가볍지 않으면 즐겁게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데 큰일이다. 하고자 한 것은 첫눈 얘긴데 그냥 아무 때나 내리는 함박눈으로 범위를 넓히고 만 것이다. 함박눈이 계속 내리면 그 즐거움과 설렘이 처음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란 점을 내 혼란스러운 논증(?) 방식에 대한 변명으로 내세우기로 하자. 

 

다시 수업 시간으로 돌아가서, 설레지 않는다는 대답도 있었다. 전에 공부한 감상주의를 얘기하는 학생도 있었다. 난 그러면 살 필요가 없다고 단호하게 대꾸했다. 첫눈을 경이와 설렘을 지니고 바라보는 것은 일상에 매몰되어 기계처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낯선 나를 그려 보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감동 없는 삶의 연속이기만 하다면 뭐하러 살아야 할까?

 

다시 눈이 와서 어린아이처럼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눈이 오지 않더라도, 노래방에 가서 함박눈처럼 춤을 추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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