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난 길

2차 섬진강 도보 여행 1: 임실- 순창(2006. 3. 17)

귤밭1 2006. 3. 23. 00:05

오후 7시쯤에 순창에 왔습니다. 40킬로미터 가까이 걸어서 많이 지쳤습니다. 저녁 먹고 여관에 오자마자 씻지도 않은 채 드러누웠는데 밤 12시까지 곯아떨어졌습니다. 일어나 보니 12시가 넘어서 있었습니다. 이제는 잠이 안 와 뒤척이다가 숙소 바로 옆에 있는 피시 방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3월 17일 9시 반에 내린 임실에는 안개가 자욱했습니다(사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안개는 땅에서 올라오는 듯했습니다. 봄의 생명력의 원천인 흙의 기운인 거지요. 혹시 거름에서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본 적이 있을까요? 그거하고 아주 비슷했습니다.

 

낮이 가까워지자 따뜻한 봄 날씨로 돌아왔습니다. 걷기에는 좀 더웠지요.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임실에서 강진의 중간쯤에 있는 청웅이란 데를 지나자 갈담천(이름이 정확한지 모르겠네요)이 도로와 같은 방향으로 흐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도로가 이 천을 따라 이어집니다. 반가워서 무조건 강둑길로 올라섰습니다. 그런데 남원에서 곡성으로 가는 길처럼 죽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갑자기 끊겨서 논둑길이나 논을 지나기도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차가 없으니 좋은 길이었습니다(사진들: 12345). 아마 과거에는 이런 강물을 따라 길이 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차가 다니지 않게 되면 길은 없어지고 맙니다. 아마, 구불구불하다는 것이 그 이유겠지요? 이렇게 해서 과거에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을 강을 따라 사람이 다니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었지만 이제는 차가 길을 결정하게 되어 직선이 됩니다. 강진에 도착하여 다시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길을 결정하는 데서 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아프게 확인했습니다. 물론 다 사람이 한 일이지요. 사람이 차를 모니까요. 차가 공기를 나쁘게 하고 자연성을 사라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빨리 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요.

 

강진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섬진강입니다. 지난번에 이 강을 따라가는 27번 도로를 걸었으므로 이번에는 무조건 강둑길을 걸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난관이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큰길 반대쪽으로 걸어가는데 큰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바위 사이를 돌아가가려는데 낙엽이 쌓여서 보이지 않은 구덩이에 한쪽 다리가 빠지는 거 있지요? 죽는 줄 알았지요. 내 무릎은 바위에 부딪혀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어렸을 때 눈이 오면 길 가운데 허방을 만들고 어른들이 거기에 빠지는 것을 즐긴 적이 있는데 그 죗값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강 중앙까지 갔다가 바위를 에돌기로 했어요. 강을 건너자니 등산화를 벗어야 했습니다.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강은 아주 차가웠습니다. 물에 발을 담그니 정신이 번쩍 드는 거 있지요. '아이구!'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돌이 미끌미끌해서 넘어질까 봐 기다시피 했습니다(사진).

 

그 다음부터는 비교적 쉬웠습니다. 둑길이 있다가 끊기기는 했지만 옛날의 흔적이 있어서 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사진 1, 사진 2). 그런데 사람의 흔적이 있더라고요. 푹푹 빠지는 곳이라 발자국이 보였습니다. 누군가 나처럼 이 길을 걸었던 거지요. 아주 반가웠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걸어서 걷기에 좋은 길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까지는 약간의 모험이 있어서 아주 재미있는 여정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일의 어려움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덕치의 일중리라는 곳까지 왔을 때 시간은 네시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걸었던 큰길로 들어서서 7시쯤에 순창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어제는 오늘 걸을 길과 비교하면 정말로 좋은 길은 걷지 못한 셈이지요. 오늘 아침 일중리라는 데로 차를 타고 가서 그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이 근무하는(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학교도 지나가게 됩니다. 이 지역은 섬진강 여행기에 많이 나오는 곳이라 아주 기대가 큽니다.

 

훈이네 집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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