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깨니 낙숫물 듣는 소리가 들린다. 어제(3. 17) 일기 예보에 비가 온다더니 그대로다. 창밖을 봤더니 그리 큰 비는 아닌 것 같다. 오늘의 일정 때문에 내려온 것이니 웬만하면 우산을 쓰고서라도 걷기로 한다.
지난번에 아침을 들었던 김밥집에서 된장찌개를 먹고 김밥 두 줄을 사서 맞은 편에 있는 정류장으로 가서 7시 40분에 첫차가 출발하는 강진, 임실행 버스를 탄다. 20분 정도 가니 덕치면 일중리다. 여기서부터 오늘의 여정이 시작된다. 지도를 보면서 오늘 걸어갈 길을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지도의 윗쪽 가운데에 27번과 717번 길 사이에 강이 보이는데 제일 위에 있는 '27'이라는 숫자 바로 아래 두 갈래의 강줄기가 합쳐지는 데가 일중리다. 여기서부터 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적성에 이르러 다시 순창으로 들어오게 된다. 참고로, 오늘 걸을 길에는 두 개의 다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첫번째가 섬진강 수련원(천담분교였던 곳)이 있는 곳이고 둘째 것이 구미교이다. 그러니까 구미교를 건너서 21번 길을 조금 걸어 내려오면 오늘 걷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데가 끝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걸어 보자. 즐길 수 있을 만큼 비가 온다. 우산에 비 듣는 소리가 여행자라는 것을 실감나게 한다. 객지에 내리는 비만큼 사람을 쓸쓸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더 외로워지기 위해서 마을로 가는 길을 버리고 바로 강둑길로 들어선다. 비가 내리는 강의 풍경은 더할 수없이 아름답다. 몇 장의 사진(1, 2, 3, 4)을 보면 공감할 것이다. 강물은 한결 깨끗해진 것 같고 안개가 둘러싼 산은 신비 그 자체다. 조금 가니 넓은 길이 된다. 포장을 하려는 것 같다. 오늘은 천담분교까지 가는 길에 차는 한 대도 만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행락철이 되면 차가 많아질 것이고 포장이 되면 더 그럴 것이다. 여기만은 포장이 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여행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차가 많아지면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지나니 비가 갠다. 천담 분교에 이른다. 도로(717번)와 이어 주는 오래된 다리가 보기 좋다. 차가 다니는 길이 싫어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그냥 내려간다. 지도에는 길이 나와 있지 않지만 가다가 막혀 있으면 돌아나오고 아니면 어제처럼 강을 건너면 될 것이다. 조금 가니 차가 다니는 포장된 길이 나오는데 얼마 안 가 강 옆으로 난 작은 길로 갈라진다. 당연히 나는 이 길(1, 2)로 들어선다. 구담리에 이른다. 강마을치고는 가구 수가 꽤 되는 것 같다. 산수유도,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에는 아직은 때가 이른 매화도 보인다. 여기서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찍었다는 표지가 있다. 이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아름다운 풍광이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다. 키가 큰 느티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지대가 높은 곳이어서 강 맞은 편이 잘 보이는 데므로 아름다울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간다. 보고 싶다. 여기서 문득 강을 따라가는 길이 끊겨 버린다. 마침 앞에 놓여 있는 징검다리(1, 2, 3)를 건너기로 한다. 맞은 편으로 가니 마치 해변처럼 자갈과 모래가 있는 곳이 나온다(사진 1, 2, 3). 길로 들어서지 않고 자갈을 밟으며 가기로 한다. 길 아닌 길은 안타깝게도 얼마 이어지지 않는다. 곧 시멘트로 포장한 길이 나온다. 이제부터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다(사진 1, 2, 3, 4, 5). 음식점과 민박집이 늘어서 있다. 여름 방학쯤엔 사람깨나 붐비겠다.
김밥으로 점심을 때운다. 여전히 강은 아름답다. 네 시간쯤 걸었을까, 구미교가 앞을 막아선다. 강과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을 알았으면 좀 천천히 여기저기 둘러볼 걸 잘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에도 단단히 정이 들었나 보다.
본격적으로 봄이 되면 여기만이라도 꼭 와야겠다. 걷기 동호인 같은 것을 조직하면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이다. 가 본 곳이 얼마 되지 않아 말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내가 본 섬진강 가운데서는 가장 좋은 길이다(그 다음이 곡성에서 구례로 가는 작은 길이다). 강의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아직은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순창에는 두시 좀 넘어서 도착했다. 좋은 곳을 보고 나니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게 갑자기 시들해져 버렸다. 또 새로 시작하기에는 시간이 어중간하기도 하고. 그래서 서울로 오는 차를 타 버렸다.
사진을 소개하면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는 것도 모른 채 외국 여행-그것도 안내자를 졸졸 따라다니는-이랍시고 돌아다닌 내가 몹시 한심스러웠다. 이런 곳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걸어야겠다.
<사진 몇 장>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 사진 6, 사진 7, 사진 8, 사진 9, 사진 10, 사진 11, 사진 12, 사진 13, 사진 14, 사진 15, 사진 16, 사진 17, 사진 18, 사진 19, 사진 20, 사진 21, 사진 22, 사진 23, 사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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