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어디를 갔다오고 있었다. 나는 면허증도 없고 앞으로도 그걸 가질 생각이 없으니까 아내가 운전하는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좁은 골목에 들어섰는데 차가 마주왔다. 그런데 우리 차가 있는 데는 세워 둔 차가 있어서 차가 끼어들 만한 공간이 없는데도 그 차는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그 차가 멈췄다면 그쪽에는 지나갈 여유가 생기는데도 그랬다. 뭐, 여기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지나갈 수 없으니 다 움직이지 못한 채 멈춰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맞은 편 차의 운전사가 하는 말이 "여자야?"다. 아마 옆에 탄 사람에게 우리 차를 모는 사람이 여자냐고 묻는 것이겠다. 참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뒤의 차의 운전사가 내리더니 맞은 편 차의 운전사에게 "여자예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아주 많이 양보하여, 내가 아내 편을 들어 정체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판단한 것이 잘못이라고 해도, 이렇게 된 게 여자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첫말부터 "여자예요?"일까? 나도 저들과 같은 남자고 한국 사람인데 저런 물음이 뜻하는 바를 왜 모르겠는가? 여자는 남자와 비교하여 차를 제대로 몰지 못한다는 것이겠다. 거기다가 여자가 건방지게 운전을 하다니 하는 마음보도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 남자들끼리 여자를 따돌리려고 하는 못된 짓도 확연히 들어온다. 어려울 것 없다. 거의 자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약호(코드)인 것이다. 어이가 없지만 상대할 마음이 없어서 그냥 가만 있었는데 아내에게는 미안했다.
며칠 전에 읽은 김선우의 글을 떠올렸다. 고속철의 여승무원을 비정규적으로 충원하는 데서 나타나는 여성 차별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내 기득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거기서 배제된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가 우리에게는 몸에 배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다.
노조든 시민단체든 정부든 권력의 맛을 본 조직의 상층부는 어떤 조직을 망라하고 스스로 엄정한 자기성찰 능력을 전면가동하지 않으면 썩어간다. 상대적 약자의 입장과 시선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지 못하면 권력에 편승하고도 그것이 편승인지 모르는(모르고 싶은!)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한다. (김선우, <'여승무원'이라는 이름의 기이한 직제>. 글 전문)
어디 조직뿐이랴! 개인도 꼭 마찬가지다. 요번에 물러난 총리에게서 보듯이 운동권에 속했던 사람이 좀 살 만하면 골프에 빠지는 것도 어느덧 약자들-운동권이야말로 이들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닌가!-의 삶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골프를 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면에서 반민중적인 행태다.
최연희 사태를 보면서 나는 그 국회의원이 우리 남성-'대부분'이라는 말을 삽입해야 정확할 것이다.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 멋진 남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까-을 대표하는 희생양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이에게 그렇게 얘기한 적도 있다. 솔직히 나는 그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다. '너는 성차별적인 행동에서 자유로운가?'하는 물음에 아니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내 부끄러운 생각과 행동을 드러낼 용기가 도무지 안 나서 그만두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의 글의 필자는 참으로 우러러볼 만하다.
친구들과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이차를 어디로 갈까 정하는데, “맥주나 마시러 가자”는 내 의견을 한 친구가 반박한다. “야, 우리끼리 더 할 얘기가 어디 있냐?”
말인즉슨 남자들끼리 앉아서 얘기해 봤자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그러니 아가씨들이 도우미로 나오는 곳에 가자는 얘기였다. 대세를 좇아 끌려가긴 했지만 내내 마음은 불편했다.
친구의 말마따나 그런 곳에 가면 우리끼리의 대화는 실종된다. 불려나온 도우미들과 블루스를 추거나 몸을 더듬느라 바빠, 대화할 새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푼다’고 강변하지만, 꼭 그렇게 저급한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자기들의 아내가 호스트바에 가서 회포를 풀겠다고 우기면 순순히 허락해 줄까? 그렇게 두 시간쯤 노는 데 드는 돈은 일인당 20만원쯤, 콩나물을 사면서도 몇백원을 아끼려는 아내가 그 사실을 안다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중년 남성들의 놀이 문화는 이렇듯 한심하다. 이건 남성들이 젊어서부터 거시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여자들끼리 만나면 “너 머리 어디서 했냐?”부터 시작해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만, 남자들은 그런 걸 ‘수다’로, ‘하등 쓸모 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곤 했다. 그러면서 남자들은 정치나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 한 가족의 가장이 되고, 생활에 치여 정치 이야기가 시들해진 중년에 이르니 할 얘기가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일, 나름의 고민이 생겨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진지하게 들어줄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인생 다 그렇지 뭐. 그 얘긴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결국 남자들은 돈을 주고 젊고 예쁜 여자를 부르고, 그들과 더불어 광란의 밤을 보내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남는 건 공허뿐이고, 다음 달에 날아올 카드대금을 생각하면 한 달 내내 마음이 무겁다.
기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일어난 최아무개 의원의 성추행은 이런 식의 술자리 문화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일어난 결과며, “술집 주인인 줄 알았다”는 그의 변명은 그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잠적 소동 이후에도 의원직 사퇴를 거부하며 버티는 것도 “사과한다”는 말과는 달리 ‘그까짓 게 무슨 잘못이냐?’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성들뿐 아니라 많은 남성도 최 의원의 행동을 비난하지만, 남성들 중 그런 술 문화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돈을 냈다는 것만 다를 뿐, 상당수는 이런 식의 단체 성희롱 경험을 한번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껴안고 가슴을 만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성적 착취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술집이 이 나라에는 셀 수도 없이 많으니 말이다.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술집이 불야성을 이루는 한, 최 의원 사건과 비슷한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런 불법 영업소를 단속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남성들의 술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여성들끼리의 모임이 즐거운 이유는 서로 관심을 가져주고, 상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리라. 남성들도 술자리에서 야구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다른 고민이 있지는 않은지 귀를 기울여 주는 풍토가 확립된다면 구태여 도우미 아가씨를 부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여성학자 오한숙희님의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남성들이여, 스트레스는 이제 수다로 풀자.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원문)
이런 글을 두고 좋다고 해야 하리라. 무엇보다도 자기 성찰과 비판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에 기대어서야, 그것도 아내가 당하는 자리에서는 아무 소리도 못한 주제에, 겨우 얘기를 꺼내는 나는 뭔가? 나야말로 바로 그 남자 운전사, 더 아프게 말하면 최연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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